[기자가 만난 사람] 남포벼루 김진한 명장, 3대째 명품 벼루 제작

인생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살면 결과는 좋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인생을 사는 건 행복

정다은 기자 승인 2021.01.07 13:58 의견 0
남포벼루 제작 김진한 명장


“작가생활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우리 인생도 그렇듯 세상은 순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가는 것 아닙니까? 말과 소가 흐르는 물을 건너갈 때 보면, 말은 빨리 건너가려고 질러서 가다가 물살에 휩쓸려 죽고 소는 물 흐르는 대로 가다보니 절대 죽지 않아요. 작가도 빨리 출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면 잘못되는 거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경력 쌓아가며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입니다.”

서예가들이 최고로 꼽는 벼루, 성주산 남포벼루. 충남 보령 성주산에서 캐온 벼루원석이 명장의 손에서 옥석이 가려진다.

조선 말기 할아버지부터 아버지와 아들로 남포 벼루의 맥을 이어가는 김진한 명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벼루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오늘도 백운상석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Q. 보령 남포의 벼룻돌을 캐내는 주산은 어디인가요?

A. 보령의 미산면과 청라면의 계계에 솟아 있는 성주산입니다. 높이가 680m로 주위에 성태산, 문봉산, 옥마산, 봉화산, 진미산 따위의 자잘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곳은 벼룻돌로 알맞은 수성암(水成岩) 지대입니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 중 동국연품 대목에서 남포석 중 금사문이 첫째요, 은사문이 다음이고, 화초문이 그 다음인데 단단하고 매끄럽되 먹을 거부하지 않고 체묵이 되지 않으면 좋은 돌입니다. 남포현 성주산 아래 석갱이 있는데 그 중에 화초석은 금빛으로 화초모양을 이루었으며 돌이 온윤하고 발묵이 좋아 단계나 흡주석에 뒤지지 아니하고 또한 알돌 자석(子石)과 구욕안이 박힌 것이 있어 매우 귀하고 얻기 어렵습니다. 실학자 성해응도 그의 저서인 연경재전집에서 “내가 어릴적부터 벼루 모으기를 좋아해서 좋은 것을 많이 모았으나 우리나라 것으로는 남포돌 중에서 최상의 백운상석을 따를 것이 없고 특히 화초석이 좋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Q.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벼루에 관심을 가지셨다고 했는데, 벼루에서 어떤 매력을 느끼셨나요?

A. 그때는 벼루에 봉황, 용 이런 것들을 조각돼있었어요. 봉황이나 용 같은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물인데 그런 것들이 너무 멋있어보였어요. 나는 벼루 만드는 게 그냥 좋았어요. 행복했고요. 내가 벼루 만들기를 너무 좋아하다보니까 공방에 몰래 들어가서 혼나곤 했어요. 중학교 때는 또 공방에 들어갔다고 혼나려니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골방에서 어머니랑 아버지가 얘기를 하시는데 내가 잘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용기를 가졌지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7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인생을 사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Q. 도자기는 맘에 안 들면 미련 없이 깨버리잖아요. 벼루도 그렇게 깨버린 적이 있나요?

A. 없어요. 벼루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리 잘 그려놨어야 뭐해, 입체감을 줘야 해요. 조각을 하면서 매화꽃을 그리는데 잘못하다보면 꽃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망치는 건 아니지요. 꽃이 꼭 거기만 피라는 게 아니잖아, 그 옆에 필 수도 있고 새로 조각해나가는 거예요. 거기서 예술도 나오는 것이고 그러니 도자기처럼 깰 필요가 없지요.

도자기는 온도를 맞춰 구우면서 잘못 나왔으면 깨버려야 하지만 조각하는 것은 위에 얘기한 것 같이 나무를 이렇게 조각하다 부러졌으면, 그 옆으로 새 가지 쳐서 나오도록 그리면 오히려 즉흥적인 예술이 더 나오게 돼요. 하지만 그것이 자기 구상력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작가님 작가생활 하시는 중에도, 짧은 시간에 와서 인터뷰를 한 걸로 또 글이나 책이 나오는 거 보면 멋있는 말을 골라다 쓰잖아요. 그걸 누가 가르쳐주나요? 본인들이 느낀 대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Q. 문화재 되는 과정은 어떤 절차를 밟는 건가요?

A. 대를 이어 오래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기법 등을 문화재로 신청하면 심의를 거쳐서 결정이 됩니다. 문화재는 무형과 유형이 있습니다. 유형이라는 것은 건물이라든지 이런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무형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지금 작가님들과 대화를 하는데 그 말소리가 있어요? 형태가 없지요. 만드는 기술에는 형태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합니다. 남포벼루를 만드는 기능보유자라고 하지요.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전통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정해주는 것입니다.

3대째 벼루를 만들고 있지만 1980년도, 제 나이 40살이 되어서야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됐습니다.

Q. 선생님 결혼은 몇 살 때 하셨어요?

A. 23살에, 아내를 19살에 데려와서 고생만 시켜서 지금에 와서 굉장히 잘하고 있어요.

그때 어머니 병환도 있었고, 서울 군부대에서부터 지방까지 공예품 만들어 팔고, 결과적으로 형제가 모두 미국 가는 동안 뒷바라지 다 해줬지요. 재산이 많지도 않아서, 아버지가 논 몇 마지기를 나한테 주고서 고향 지키면서 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봤을 때 ‘너는 충분히 지킬 만한 놈이다.’라고, 나를 테스트하고 살림을 맡겼어요. 그렇게 해서 논 조금 팔아서 막내랑 형제들 다 미국 보낼 때 보태서 보냈고, 또 내가 열심히 순리대로 살다보니 지금은 청라면에서 최고 많이 갖고 있으니까 잘 산 거지요? 거지도 진실하게 살면 복이 오게 돼 있습니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돼 거지가 되는 것이지요.


Q. 중간에 ‘내가 벼루를 때려쳐야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하셨어요?

A. 워낙 즐겁게 즐기면서 하다 보니 그런 적은 없었어요. 지나친 욕심 부리지 않고, 그저 벼루를 해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당연한 것으로 느끼기 때문에 기술을 문화재로 인정까지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봤을 때는 자기가 하고자하는 것을 즐겁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불평해봤자 뭐하겠습니까? 스트레스만 받겠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천직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작품을 만들다보면 멋있는 걸 만들게 되고 그 세계로 가는 거예요. 작가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세상이 순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가는 것 아닙니까?


“항상 만드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가고. 그만큼 즐겁게 하고 있어요. 손이 다 구부러졌을 정도로. 어떤 사람은 ‘80에는 일 안 하는 건데 왜 80에 일 하냐?’ 하는데, 그럼 80먹었다고 일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죽은 신세나 마찬가지 아니냐. 인생은 죽는 날까지 일하는 것이다 생각해요. 언제까지 일하고 더 이상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이까지 일하다 보니 나는 아직 청춘이여∼ 이제 8살밖에 더 먹었간?”

그동한 작성한 방명록


한편 김진한 명장은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는데 2020년 12월 19일 김경희 작가와 본 기자가 5781, 5782번째 방명록을 작성했다. 방명록에는 남포벼루를 다녀간 소감도 함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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