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김용희 어머니 1936년

무명천에 핀 목단꽃

김경희 작가 승인 2021.02.09 14:34 의견 0

꽃비들이 흐드러져 봄이 깊었던 4월의 그믐날에 남편을 떠나보낸 어르신. 평생 동반자요 동지였던 그니가 떠난 날 부축하는 딸들이 곁을 지켰지만 허전한 마음을 보듬기에는 긴 날들이 필요했다.
녹음이 짙어 세상은 푸르름으로 뒤덮였었다. 여든일곱 해 동안 해마다 봄이 가고 여름 오는 길목에서 녹음을 만났다. 그리고 단풍드는 가을 앞에서 배웅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어르신, 매서운 바람이 아닌 장독대에 쌓인 따뜻한 함박눈처럼 햇살에 부서지는 따뜻한 겨울날이기를 소망하고 계신다.


손끝이 곱고 맵던 큰 애기

나는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가 고향이다.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고 동생 둘을 먼저 가슴에 묻고 바람결에 날려 보내며 일찌감치 슬픔을 달래는 법을 배웠다. 홍역을 앓던 동생들이 벌겋게 열이 올랐던 그날을 기억한다. 숨을 헐떡거리며 자지러지는 울음을 토해낸 동생은 다음날 울음보를 터뜨리지 않았다. 그 아이는 땅에 소리 없이 묻혔다. 당시를 회고하면 오죽하면 10남매 낳으면 반 만 남아도 다행이라는 거친 말들을 썼을까 싶다.

인생의 아픔들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왔다면 여든 일곱 해를 살아낼 수 없었다. 때론 망각이라는 도구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더 큰 슬픔으로 지난 아픔을 덮기도 하고 살맛이 난다며 기쁨으로 위로받기도 한다.

나는 동년배보다 키도 컸고 부지런했으며 손끝이 곱고 야무졌다.

동네에서 자수 곱게 놓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김 씨네 둘째’하면 인근까지 다 알아줬다. 베갯잇과 치마 끝에 목단 꽃으로 수를 놓고, 별이 수놓은 길 따라 야학을 다니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갔다.

내 손 땀으로 베갯잇에 어여쁘게 핀 목단 꽃은 이웃아낙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값을 지불하면서 사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무명천 위에 꽃을 한 송이 두 송이 심으면서 고운 큰 애기로 성장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시집가는 새댁 베갯잇에 예쁜 꽃들을 수놓아 주고 품삯을 받기도 했다. 정성을 값으로 매길 수 없지만 내 손끝으로 신랑 신부의 첫날밤이 곱게 수놓아 진다면 그만한 값도 없었다. 야학에 다니면서 가나다라를 배웠다. 등불 없는 밤길이 두렵지 않았던 건 한 글자 한 글자 배우는 기쁨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내 이름을 쓰고 부모님 이름을 쓰는 그 맛에 칠흑 같은 밤길을 동무들 손잡고 매일 오고갔다.


친정집은 부유하고 인정이 많아 아버지는 6·25때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피난민들에게 문을 열고 청국장 한 그릇이라도 같이 나눠먹을 수 있게 하셨다.

아버님의 속 깊은 성정은 동네 어귀까지 닿아 우리 집 대문은 밥 때가 되면 더 활짝 열렸다. 피난길의 청국장 한 그릇은 사람을 살리는 밥상이다. 그 절절한 때에 맞아주는 이도 생명의 은인이지만 구수한 청국장으로 속을 데워주는 주인장은 피난민들에게 보살님 같은 분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허겁지겁 먹던 피난민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굴이 때꾼한 채로 입천장을 데어가며 청국장을 먹던 사람들, 시절을 잘못 만나 고생한 사람들이다.


형부가 집안일로 가을에 시제를 지내러 다니시다가 몇 차례 지켜본 청년이 참하고 성실하다며 중신을 섰다. 내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 한귀전 님을 만났다.

남편은 6남매의 장손이었고, 집안도 한 씨 종손집안으로 어렵게 살지는 않았지만 머리들이 좋아서 공부를 가르치느라 항상 절약하고 사셨다. 남편은 공민학교 4학년까지 다녔고 동생들 가르친다고 집안 농사일을 하고 열여덟 살 무렵부터는 야학선생님을 하던 중 나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성실하고 온순한 미남이었다. 한번은 야학에서 책거리 한다고 학생들이 음식과 막걸리를 준비해 와서 한 잔 두 잔 받아먹다가 집으로 업혀왔다.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양반이 학생들이 주는 술이라 거절할 수 없어 죽을 각오를 하고 마셨던 것이다. 집안이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었다.

나도 새댁 때라 허둥지둥 뒷수습하느라 물 떠다 드리고 속 가라앉게 하는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입에 넣어 속을 달래게 했다. 술 못하는 양반 덕에 혼쭐이 났던 날이다. 술주정을 몰랐던 점잖은 사람, 곧고 의로운 양반이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한숨 그리고 인내

시집왔을 때 막 시동생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 다닐 때라 아침이면 도시락을 열댓 개씩 싸서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반찬이라야 단무지에 시어빠진 김치지만 들고 나가는 뒷모습만 봐도 힘이 또 생겼다. 그 와중에 우리 아이들이 먼저냐 시동생들이 먼저냐 수없이 고민하는 일들이 많았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때라 결국 시동생들이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시동생과 우리 아이가 같이 대학교에 진학하게 됐을 때, 시동생 먼저 학교에 보내느라 우리 딸이 대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애간장이 녹았지만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며 눈으로 “미안하오.”라고 말을 건넸다. 딸아이는 밤새 뒤꼍에 나가 울고 나는 부뚜막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시동생들 모두 대학까지 마쳐주고 정작 내 딸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대신하게 했던 아픔은 가슴 한편에 묻었었다. 문득문득 울분이 차올라 올 때는 울화도 같이 치민다.

우리 막내딸은 열 살부터 소녀 농사꾼이 되었다.

엄마 힘 드는 꼴을 볼 수 없다고 그 고사리 손으로 돕겠다며 학교만 다녀오면 밭으로 바로 달려왔다. 일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어른들 농사 흉내를 제법 냈다.

열아홉 새댁으로 고단했지만 든든한 남편 덕에 힘든 마음자리는 위로가 되었다. 점잖은 남편은 어머니 몰래 손을 잡아주며 조금만 참자고 나를 다독였다.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남편의 말 한마디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죄인이었다. 노여움 많은 시어머니가 내 혼수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두고두고 재봉틀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때 귀한 혼수가 재봉틀이었다. 시어머니께서 심통 부리는 날이면 시동생들도 말리기 힘들었고 나는 말없이 호미 들고 뒷밭에 나가 애꿎은 고랑만 파고 한숨을 묻었다.

나는 마루에 올라가서 밥을 먹지도 못했다. 내 밥상은 부뚜막에 차려졌는데 한 술 겨우 뜨자마자 시어머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물 떠와라.”

갖다 드리면 다시

“깻잎 무침 더 내 와라.”

“된장 한 술 더 퍼 와라.”

매 끼니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 부아가 치미는 날이면 밥상을 마당으로 던지는 건 예삿일이라 주워 담느라 눈물 콧물이 뒤섞여 한숨만으로는 위로가 안 되었다. 남편은 너무 미안해하며 슬며시 밥상을 물리고 흙더미에 묻힌 종지들을 하나씩 챙겨주었다. 어머니 볼세라 또 내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 품에 안겨 울고 싶었지만 그건 어머니 화를 더 부추기는 일이라 가슴을 부여잡고 울음을 삼키고 또 삼켰다.

왜 그리도 모질었을까?

어머니도 시어머니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하셔서 상처만 남으신 분이었다. 결국 한이 많으셔서 며느리한테 사랑을 베풀 수 없으셨다. 그 속내를 다 풀어드리지 못하고 보내드려 안타까움만 남았다. 사랑을 대물림하는 것도 아까운 일인데 우리 옛 어른들은 상처를 만져주는 이들이 없어 결국 대물림하면서 또 생채기를 내곤 했다. 먹고 살기 급급해서 마음의 빈곤이 가져오는 슬픈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풍요로운 때 에도 사람들은 왜 이리 각박한지. 나이든 우리가 “세상이 말세다.”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억척스럽게 집안일을 50여 년 쉼 없이 했다. 훈장처럼 따라온 굽은 허리, 손가락 마디마디의 통증들이 살아온 날들을 반증하지만 지난 세월이 야속하지는 않다.

나보다 더 힘들었던 남편, 하늘나라 가는 길 먼저 배웅하며 그 양반이 혼자 남게 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남편이 나 없이 혼자 쓸쓸이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서 내 기도는 그저 ‘남편보다 하루 더 살게 해주세요.’였다.

4년 전부터 군포 아들집에서 거하며 내 피붙이들과 살가운 시간들도 보내고 있다.

노년의 큰 기쁨이 없어도 섭섭하지 않은 건 지난 여든일곱의 내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자존심을 지켰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남편과 김 용희 어머니

김용희 어머니는 80세 까지 다듬이질로 옷감을 다리셨다


나는 옛것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다듬이질을 여든 살까지 했다. 세탁한 옷감을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기면 옷감의 씨줄날줄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현대식 다리미가 따라올수 없는 다듬이질의 정교한 질서가 있다. 우리 노인들의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배움이 짧고 우물 안 개구리로 여든 넘게 살아왔지만 학식 많은 젊은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병기를 갖고 있다.

얼기설기 실타래들이 수십 년, 그 많은 세월동안 자수천 위로 피어올랐다.

피륙위에 곱게 앉은 목단꽃이 내 인생과 많이도 닮았다.

목단꽃 향보다 더 진한 인향(人香)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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