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화가” 신현국, 색채와 생명의 연금술―신(神)들의 산 계룡산에서

이연자 작가 승인 2021.04.08 14:40 의견 0

100만 번의 붓터치에 켜켜이 담겨있는 시간은 그 누구도 표절할 수 없다.
시간이라는 질료에서 건져낸 연금술은 너무도 담박(淡薄)하고 담담하나 또한 담대하다.
내 앞에 앉은 화가는 만지면 닿을 수 있으나
겁을 통과한 생명의 시간은 만질 수 없네.
한 겹씩 한 겹씩 에고를 벗겨낸
화가는 한없이 투명하다.
너무나 투명해서 천진하다. 투명함은 만질 수 없다.
전생 어딘가에서 수행한 내공으로 이생에서 물감과 붓으로 정진하니
창조주가 기뻐할 일이로다.

신현국 화백


순수한 열정이 푸른 불꽃으로

‘축복(blessing)’은 불어의 ‘상처입다(blesser)’와 어원을 같이 한다. 축복을 헤아릴 때 상처를 빼고서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몹시 단순하게 ‘계룡산 화가’라고 호칭되는 신현국 화가는 일생을 그림에 헌신하였다. 재능을 축복받았다고 쉽게 말하기보다 축복에 걸맞게 한평생을 오롯이 그림으로 정진하였으니 존경을 드린다. 그렇다면 정진한 인생을 축복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마치 수도승처럼 하루를 오전 오후로 나누어 오늘도 계룡산 그리기 작업에 매달려 있다. 화가의 노력에 수많은 평론가들이 화답하였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한 줄을 더한다면 화가가 붓으로 쌓아 올린 인고의 시간을 훼손하는 것이리라. 이글에서 기나긴 인생 여정을 잠시 함께함이 나의 축복의 시간이었으며, 계룡산이 위대한 화가를 품을 수 있도록 여러 보이지 않는 손길(인드라망)에 감사를 바친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존재하며 우리의 고향이 되는 계룡산의 푸르름처럼 그림 하나만 붙들고 올곧게 살아오신 분이다. 3월호에 다루었던 해월스님과도 가까워서 자주 교류하셨단다. 개인전 47회와 그룹전 약 800회를 참여하셨다. 가장 최근에 참여하신 건 3월 1일부터 31일까지 열린 가평의 전시회이다.


하루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요?

보통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작업실로 내려와서 그림 그릴 준비를 한다. 마치 수도사가 새벽기도를 올리듯 붓들을 매만지고, 물감을 확인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본가에서 8시 30분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서 그림을 그린다. 12시에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러 작업실로 내려온다. 주로 5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본가에서 저녁식사를 6시까지 마치고 동네 산책을 시작한다. 때론 차를 타고 갑사로 가서 걸을 만한 곳을 산책한다. 사계절 내내 겨울에도 산책을 빠뜨리지 않고 대강 다닌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시간표가 짜여 있고, 되도록이면 그 루틴에 따르고 있다. 세상이 물질문명에 오도되어있다 하더라도 산과 가까이하는 화가는 마음이 천진해지는 것 같다.

작업실


손님이 오시거나 외부에 나갈 일이 있으면 업무를 보고 다시 돌아와서 나의 일상에 충실한다. 쉬지 않고 작업을 하는 이유는 화가는 그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업을 해야지 다른 짓에 열중하면 안 된다. 일 년에 한두 편 작업을 해서 전시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작가니 화가니 폼을 잡아도 소용이 없다. 작업실을 가 보아야 그 작가가 얼마나 열심히 작업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동안 작품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별로 빛을 받지 못한 경향이 있다. 예측하건대 미술가의 르네상스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평론가 그룹, 예술애호가 그룹 등 새롭게 재편된 미술 소비시장이 활발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덧 계룡산에 들어온 지 40년이 넘었다. 처음에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옆 학봉리에서 살면서 작업했는데 87년도에 수해로 거의 모든 작품이 소실되었다. 충남과학고등학교 뒤 국사봉 줄기 중턱에서 작업하였는데 4차선 도로가 개통되고 자동차들이 질주하면서 내는 소음이 증폭돼서 다시 작업실을 옮겨야 했다. 계룡산 일대를 다 돌아다녀서 따뜻한 구왕리와 인연이 닿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구왕리 마을은 현재 ‘왕흥장악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20년이 흐르는 동안 내가 심은 묘목이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안식구와 나는 본채에 거처하며 별채는 내 작업공간으로만 사용하면서 오로지 작품에 매달리고 있다. 좋은 작품만 생각하다 보니 세상사에 대처하기 위해 마음이 바쁘지 않아서 좋다. 사회적인 정치성이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고 싶지 않다. 하루 종일 작품 하느라 작업실에 붙어있어도 작품이 내 마음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작품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해야 한다. 쉽게 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작가는 진실하고 큰 꿈이 있어야 한다.

꽃, 40.9x31.8, Oil on canvas, 2015


나를 그림의 길로 이끌어주신 스승님

작은 아버지가 일본에서 화가로 명성이 있으셨는데, 잠깐 그림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할머니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대로 영정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사진처럼 정밀하게 할머니의 모습을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을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좋아했고 잘 그린다고 소문이 났다. 스케치도 많이 했고 물감과 붓을 가지고 놀았다. 형제들이 5남 2녀인데 전부 다 그림을 좋아했다. 특히 형님은 비구상작업을 하셨고 막느냐는 조폐공사 디자인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되었고, 6·25 때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실직해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나는 일찍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군이나 전국 규모의 사생대회에 나가면 상을 휩쓸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설봉 김두환 선생님이 일본에서 미대를 나온 1세대인데 예산이 고향이고 마침 아버지와 친구이셨다. 어느 날 친구가 그림을 하니 한 번 가 보자 하시며 내 손을 잡고 예산읍으로 가서 첫인사를 시키는 자리에서 “내 자식이 그림을 좋아하니 한번 지도해 줘라.”하고 부탁을 하였다. 선생님은 “아하, 그러냐. 그럼 어디 손을 한번 그려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연필로 손을 쓱쓱 그려서 보여드렸더니 감탄하시면서 내게 고맙다! 하고 말하시더니 그림을 그리러 와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댁도 마침 예산국민학교 옆에 사셨다.

나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바로 달려가서 수채화와 목탄화를 배웠다. 그때 목탄화도 처음 알았다. 지금도 목탄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그분 댁에 드나들었다. 선생님의 자제분 중 홍익대 후배도 있다. 선생님은 이마동 홍익대 교수와 친구이신데 홍익대로 오라고 제안을 받았지만 가지 않으셨다. “그림은 바로 이런 것이다!”하는 것과 “화가는 오직 그림에 천착해야 한다”는 철학을 배웠다. “그림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너무 의식해서는 안 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고 어린 나에게 보여주시고 은연중에 나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홍익대학교에서 수화 김환기(1913~1974), 남관(1911~1990), 이마동, 이종무 선생님에게 사사했다. 우리나라의 대가이신 선생님들의 영향으로 비구상을 배웠다. 말 그대로 화가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표현해야 한다. 또한 위대한 스승들은 나에게 그림 이외의 인문학과 미학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영향을 주었다. 스승들의 영향으로 추상화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화단에서 나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과 사고의 세계를 화폭에 담는 비구상작품을 시작해서 비구상작품만으로 1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도 비구상과 구상이 중첩되어있을 것이다.

산의울림, 390.9x162.2, Acrylic on canvas, 2018


인연과 필연이 계룡산으로 이끌다

오산고등학교에서 4년 동안 미술선생으로 근무했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교육이라는 것이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제자들과 생활했다. 이종건 교장선생님이 예산 농고에 출근하실 때 말을 타고 다녔다. 1950년대 중후반 산업화와 공업화의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예산농고 졸업생들이 졸업하고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대학진학을 하지 않는 졸업생들이 지역농촌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을 직시한 이종건 교장은 예산지역을 면밀히 조사하였다. 국토의 61%가 임야였던 예산의 소득이 높은 재배품목은 사과로 선정하고 전공과목을 불문하고 과수교육을 하게 된다. 오늘날 ‘예산 하면 사과’라는 인식의 단초가 예산농고 이종건 교장의 역할이 컸다.

산의울림, 116.7x91.0, Acrylic on canvas, 2015


내가 서울 오산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이종건 선생님은 학무국장(지금의 교육감)으로 승진해서 일하고 계셨다. 어느 날 수업시간인데 전화가 왔다고 전갈이 왔다. 교무실 전화기 너머로 이종건 선생님이 “너 뭐하러 서울에 있느냐? 네가 홍익대 나온 거 아는데 그림을 그려야지 선생을 하고 있느냐? 얼른 대전으로 내려와라.”하고 주소를 주셨다. 토요일 수업 마치고 대전으로 뵈러 갔더니, 나를 데리고 간 곳이 동학사였다. 산도 좋고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나는 대전에 계룡산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옛날에 삽작고개, 아리랑고개라고 하는 유명한 고개까지 쓰리쿼터(소형 트럭, 지금의 SUV)를 타고 올라가서 전망을 바라보니 장군봉이 놓여 있는 계룡산의 웅장함을 보면서 감격하였다. 그 고개를 넘어서서 간 곳이 동학사였다.

이종건 선생님은 작은 다리 아래 계곡물에 손을 닦으셨다. “자네도 한번 손을 닦아보게나!”

나 역시 청정의 물에 손을 담그고 두 손을 바가지 삼아 마시니 물맛도 달콤하고 시원하여 오장육부가 청소가 되는 듯 좋았다. 관리사무소까지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진 곳에서 막걸리 한잔을 먹으면서 우리는 계룡산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종건 선생님은 생물을 전공하셨는데 그림을 좋아하셔서 세잔느 등 화가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스스로 너무 감격을 해서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지 않은가?”하고 말씀하신 게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특별한 인연이라면 예산농고에 다닐 때 아침 조회시간에 이종건 교장선생님이 훈화하시고 전국 사생대회 등에서 상을 독차지하던 나를 전교생이 도열한 앞으로 불러내셔서 상장을 받은 기억이 아스라하다. 그래서 1973년에 대전으로 이사를 하였고 여러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였다. 결혼하고 얼마 후 미술선생을 그만두고 드디어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림에 몰두하며 정신은 푸르렀으나 삶은 만만하지 않았다.


무위자연과 인드라망

바람은 험준한 산을 어루만지며 넘어가다가 깊은 골짜기의 샘물 소리가 흐르는 소리를 귀 기울일 것이며, 생기 있게 샘물을 끌어 올리는 나무의 어린잎을 대견하게 여기리라. 어린 새는 어미 새를 쫒아가며 나는 법을 배울 것이고 계룡산 아래 붉은 소나무는 저 혼자 서서 화가의 눈길에 화답하리라. 화가는 주어진 천명으로 살아가기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거나 욕심낼 필요가 없다.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하리라. 고독한 가운데 수도승처럼 매일 매일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알고 있던 기성의 테크닉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얻으려 한 것은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것이리라. 모든 것은 자연이며 풀 한 포기 나비 한 마리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까지 모든 존재는 공생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끊임없이 확장을 통해 번성하고 절정에 이르다가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순환되어 자연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 비구상을 했다가 계룡산에 오면서 산이 아름다워서 능선이 보이도록 굵게 그리다가 마치 계룡산의 부드러운 숨결처럼 바꾸게 되었다.

거처에서 바라보는 계룡산은 10만 번이고 20만 번이고 되풀이되어서 눈을 감아도 계룡산의 혈맥이 인간의 핏줄처럼 훤히 비쳐질 정도일 것이다. 매일 눈으로 익히는 그 산은 억겁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화가는 언제나처럼 정갈한 마음의 눈으로 산의 혈맥을 짚는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절절한 마음을 가지고 깊이 있는 자연을 대한다. 신이 만들어 놓은 좋은 자연을 겉모습, 색 등에만 취해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나직하게 읊조린다. 고요하며 생명의 기운이 관통하는 화가의 고요한 어조와 선한 미소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얼굴의 선은 자신이 표현한 대로 산중에서 산, 나무, 숲과 어울려 사노라니 몸도 마음도 넉넉해져서 일 것이다.

자연과 생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서 생명의 역동성을 진하게 때로는 연하게 표현하는데 자유로운 경지에 오른 것 같다. 화가 자신도 생각하는 것보다 붓을 들고 있을 때가 더 좋다고 하신다. 산의 강렬함이 화가를 흔들 때 화가는 언제고 바라볼 것이며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화답한다.

산의울림, 90.9X72.7, Oil on canvas, 2014


그림과 시와 단상들-화가의 블로그에서 채집

2009년 10월 30일

‘늦가을’ 작품 아래 화가의 시가 펼쳐진다.

저 조용한 그곳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고동빛에서 감도는 살구빛이 떠오른다

오늘은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구빛 속으로

빛을 잃어간다고 느낄 때쯤 찾아오는 황량함도

오늘은 잊어보리라


2010년 4월 8일

한국의 적송은 외롭고 고독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위엄, 모든 것들을 품고 있는 자연에 대한 겸손한 자세, 그것은 소나무를 통하여 자신을 비춰내고 싶은 작가의 열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춤을 추고 있는 듯한 그 생명력은 자연스레 화면 전체를 융화시키고 어느새 그 붉은 색의 향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며, 굵고 빠른 붓 터치에 의해 산과 나무는 하나가 된다. 살포시 바람이 부는 날, 덩실덩실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이 춤을 추고 있다.

갑사 가는 길을 걷다 보면 “좋아하는 산과 들을 한없이 볼 수 있고 좋아하는 산바람을 안고 돌아올” 수 있어서 행복한 화가. 겨울에 온통 눈으로 묻혀버린 계룡산은 중후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을 화가는 단순한 톤과 절제된 터치로 가라앉히고 만다. 그러나 골짜기 아래 수십 길 깊이로 가라앉는 세월 속에 묻는 뜨거운 가슴은 적송이 되어 한 귀퉁이에서 산을 바라다본다.

2013년부터 ‘산의 울림(Echo of Mountain)’ 연작 작품을 그렸다. 그림의 기법들이 변화가 있는데 변화란 당연한 것이며 작가가 끊임없이 정진하고 잇다는 증거이다. 굵고 힘찬 터치와 밝은 색깔로 이루어진 계룡산이 점차로 뭉개져가며 모호해져가지만 그곳의 중심에는 언제나 계룡산의 자연이 묵묵히 존재하고 있다.

화가가 쓴 빛깔들은 “하늘과 맞닿은 신록으로 경쾌하게 움직이는 맑고 푸른 에메랄드의 녹색들”로 무거운 속에서도 시원하게 이어가는 인간 정신의 생명력이다. 화가가 표현한 봄은 또 어떠한가? 땅속을 뚫고 나온 해맑은 포근한 빛은 무엇이든 품을 수 있을 듯 부드러움이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만물을 싹틔우는 힘이 들어있을 뿐이다. 여름은 깊어가서 한낮의 계룡산은 더운 공기가 온 산을 뒤덮으면 청록의 자연은 더욱 선명하며 청량해서 여름을 담은 숲과 숲을 담은 계룡산이 화가의 가슴으로 안겨서 화가는 한없는 행복을 느낀다. 가을빛은 천지에 가득하고 무르익은 풍성함은 기쁨이 한가득이다. 풍성함과 기쁨 이면에 비가 구슬프게 내리기라도 한다면 낙엽이 떨어지면서 비와 함께 떨어지는 소리라 우렁우렁 화가의 귀에까지 슬프게 들린 것 같다.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2007년)로 계룡산의 사계절이 시시각각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화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계룡산을 마음을 열어서 보라고 주문하고 있다. 마음을 열어 주위를 살피고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고 마음을 열어 산속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나무가 보이고, 산이 보이고, 숲이 보이고, 이윽고 바람이 보일 뿐이다. 그 선선하고 때론 웅장하고, 때론 섬세한 붓질 아래 바람이 보인다면, 바람 소리가 들린다면, 그대는 바로 교감을 하고 있다.

출처: https://blog.naver.com/withahri/120093722678

산의울림, 53.0x45.5, Oil on canvas, 2020


비평가의 말 말 말

화가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대전미술계를 주도하는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신항섭은 1970년 중반 안국동 로터리 조계사 건너편 미술회관에서 개인전 할 때 처음 화가의 작품을 대면했다. 모노크롬(비구상)이 대세인 시대였는데 늘 고향과 관련한 자신의 체험적인 삶과 연관성을 추상인데도 구상이 엿보이는 작품세계에 감동하였다. 원숙한 색채와 함께 붓 터치는 거침이 없어서 장중하기 이를 데 없다고 회상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빛이 있는 자연’이란 명제의 작품들에서 계룡산을 중심으로 자연세계에 대한 인상을 담았다. 외경(畏敬)스런 광대함이 아니라 그가 펼쳐 보이는 세계에는 따스함이 가득하다. 생명의 기운을 보듬어 그 자연스럽고 영성(靈性)이 깃든 생성사멸을 총체화하는 담대함으로 녹여서 끌어안는 것이다.

“어쩌면 멸종위기에 놓여 있는 미학적 견인주의자의 풍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이가림은 말한다.

출처: http://www.richmagazine.co.kr

방근택은 “한국적 생활이념을 환상적 이미지로 표현한다”고 주목하였다.

신항섭은 “신현국의 산은 거인과 같은 결코 허물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표현함으로써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결시키고 있다”고 했다. 신항섭은 또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 및 이해를 통해 그 정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며 이를 토대로 양육된 그의 미적 감수성에 주목하였다.

이가림은 “신현국 회화가 보여주는 담백하고 절제된 비구상의 압축미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생명의 깊이, 그 신성성과 아름다움을 거의 동양화적인 붓질로 표현한 자연찬가(1999)”라고 했으며, “계룡산의 현장성을 몸으로 철저히 수렴함으로써, 개념으로서의 산, 관념으로서의 산 그림이 되지 않도록 한 데에 그의 회화적 가치가 주어진 것”이라며 “영성이 깃들어 있는 산 그림만을 고집스럽게 그린다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하나의 반시대적 항변일 것”이라고 피력했다.

조성지(2011)는 “산이 대관적이면서도 위협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대지가 깊게 느껴진다”고 통찰하였다. “높은 데를 그리워하면서도 나지막한 곳들을 두루 살피는 마음”이 화가의 산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전하는 예술의 존재 이유라고 들려준다.

장준석은 “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남다름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그려낸 산의 정기와 같은 힘”라면서 “각고의 노력 및 열정으로 형상화한 것”이며(2012), “어떤 절대적인 기운은 곧 산과 자연의 본질로서, 작가의 관조 속에서 드러나는 계룡산의 실체이자 생명이라 하겠다. 이는 더 나아가 그만이 이룩해낸 생명의 아름다움이자 산의 순수함”이라고 표현했다.

이가림은 “사진과도 같이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산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그리고자 하였으며, 신현국에게서 “멸종위기에 놓여 있는 미학적 견인주의자의 풍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경은 이가림을 인용하며 “원초적 시원의 소리, 다시 말해서 계룡산의 장중한 합창 소리부터 한 포기 풀잎의 흔들림에 이르기까지의 울림이 들리는 듯하다(2019)”고 표현했다.

신현국 화가는 “그림에 영혼을 담아내고 싶다. 그러니까 누군가 작가의 그림을 소장하는 것은 그의 영혼과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혼과 혼으로 만나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출처: http://www.goodmorningcc.com

인터뷰를 끝내며

고흐의 광기를, 리스트의 광시곡을, 언어를 해체한 박상륭을, 젠더를 넘어선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좋아하는 나는 게이와 레즈비언을 다룬 퀴어이론(queer theory)으로 학위를 받았기에, 예술은 어딘지 급진적이고 역동적이고 비틀어져야 멋있다고 믿고 있었나 보다. 담박(淡薄)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재물·명예·사랑·미움 등에 끌리지 아니하는 담담하고 소박한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폼생폼사! 동네에서 놀며 한껏 폼을 잰 하수(필자)가 모든 것을 걷어낸 담박하고 투명한 고수 앞에서 갑자기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신현국

32164 충남 공주시 계룡면 왕흥장악로 213

http://blog.naver.com/withahri

1938년 충남 예산 출생

1958년 예산농업고등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 회화과 졸업

1964년 <잃어버린 고향전>을 시작으로 개인전 47회, 800회 이상의 초대전 단체전 등 전시회

2016년 대한민국미술인상 본상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몽골미술제·겸제정선미술제, 대한미국청년비엔날레 심사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전업미술가협회 고문, 상형전고문, 한국창조미술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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