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청가곡연주회’ 바리톤 박강조 선생 가족이야기

민순혜 기자 승인 2021.05.07 15:34 의견 0
바리톤 박강조 선생


박강조 선생이 ‘대전충청가곡연주회’에서 처음 노래를 할 때는 둘째 며느리와 함께였다. 박 선생이 가곡을 좋아하고 틈만 나면 노래 부르는 것을 본 둘째 며느리가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곡 연주회에 연주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 며느리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그 후 박 선생은 거의 매달 연주회에 참가해 열심히 갈고닦았던 기량을 맘껏 발휘하였음은 물론이다. 가정의 달 5월이 되니 새삼스럽지만,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사전적 의미로는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아들, 딸, 손자, 손녀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한다. 그런 때문에 가족이라는 이름은 밤낮으로 불러도 늘 아쉽고, 평생토록 품어도 늘 그리운, 마음이 기억하는 그 이름, ‘가족이라는 이름’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박강조 선생 가족

박 선생은 가족 사랑도 남달랐다. 지난 2020년 8월 가곡 연주회를 며칠 앞두고 박 선생이 갑자기 연주를 취소한 일이 있었다. 더욱이 작년 상반기는 코로나19로 인해 연주회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가 가까스로 개최됐던 건데 취소를 한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큰아들(48세)이 뇌출혈 수술 후 중증장애로 재활 치료를 하고 있어 아비로서 당분간은 모든 것 다 접고 오로지 아들한테만 전심전력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몸을 치료하려니 마음도 같이 병행해야하기에 아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불현듯 가족이라는 이름이 뼛속 깊이 사무쳤던 기억이 난다.

박강조 선생 부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박 선생은 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다. 가족이 각자 역할 분담을 하듯 박 선생은 두 아들과 따로 살지만 원격으로 조정하는지 서로 부족한 것은 도우면서 살고 있어서다. 특히 박 선생은 고향인 공주에서 세종시로 이사 온 후 그 당시 70세인 아내에게 운전을 배우게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세종시로 병원(박훈, 두리 이비인후과 원장)을 이전 개업하고, 주변에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알고 박 선생은 아내에게 아들네 병원 직원 점심을 부탁하였다. 아내는 흔쾌히 매일 오전 점심을 준비하여 손수 운전하여 병원에 배달한다고 하니 늦게 배운 운전이 아주 유용한 생활수단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일원으로 서로 돕는 것이 즐거워보였다.

박강조 선생 내외는 큰아들네도 자주 들러서 아이들과 놀아줬다. 큰아들은 뇌출혈 수술 후 재활치료를 하고, 큰며느리는 공주의 한 어린이집 원장으로 매일 아침 출근을 해서다. 박 선생 내외는 아이들과 놀아주며 때가 되면 밥상을 차려줬다.

박강조 선생 사모님과 며느님

손자와 손녀는 할머니 음식이 맛있다며 많이 먹고 패스트푸드는 아예 입도 안 댄다고 하니 할머니의 온정이 통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문득 궁금해서 “할머니가 음식을 맛있게 하시나봅니다?”라고 물었더니 박 선생은 안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데 가족의 단란함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박 선생은 밭농사를 짓는다. 농사일이 자연과 함께 하는 거라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신비의 놀라움을 하나씩 배우며 깨우친다. 겸손과 순종의 이치로 자연에 따라 하늘과 땅 눈과 비바람에 감사드리는 농사일이 박 선생에게는 소중하다. 아무튼 지금은 큰아들이 쾌유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라고 한다.

나 또한 계절이 지나가듯 나쁜 상황들은 떠나가고 박강조 선생의 아름다운 우리 가곡이 온 누리에 퍼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바리톤 박강조 선생

사진 : 박강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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