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인생의 소롯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무쇠 같은 남자, 1938년 손일등 어르신

김경희 작가 승인 2021.10.12 15:56 의견 0
손일등 어르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시 ‘곡강(曲江)’의 한 구절이다. 그때는 인생 70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에 백수를 넘긴다면 천하제일의 축복이라고 회자되었을 것이다. 104살의 어머니, 그 어머니와 봄날이 절정일 때 이별하신 손일등 어르신. 백수를 넘긴 어머니지만 떠나보내는 마음은 어떤 위로로도 달랠 수 없다. 여한 없이 모셨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더 잘해드리지 못한 마음의 빚을 탕감받기에는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 먼 하늘을 올려다보셨다. 눈물고인 눈동자 한가운데 분명 어머니께서 다소곳이 앉아 계실 것이다. 어머니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질세라 한참이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신다.

내가 나고 자란, 그리고 내가 영원히 거할 내 고향

■ 그리움이 화석이 된 그 사람들

아내를 보내고 어머니를 7년간 모셨다. 아내를 보낸 허망한 가슴을 달래느라 어머니에게 더 깊은 마음을 드렸다. 3년 5개월 동안 아내 없는 빈자리를 지키며 어머니를 돌보았다.

남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한계가 있어서 나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다. 기저귀를 때때로 갈아드리는 것도, 나의 무딘 손마디가 해내기에는 어줍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거동이라도 할라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결국,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되는 어린아이가 된 어머니를 나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그날을 만났다.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나의 나이든 몸과 기력을 청춘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몸은 요양원에 모셨지만 발길은 내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한쪽 팔로 어머니를 감아 안을 수 있을 만큼 어머니는 여위고 사그라들었다. 하루하루 어머니의 숨소리가 낮아지면서 어머니는 그렇게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

그리운 이들을 떠나보내는 날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아주 멀다.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그 이들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쉬운 마음자리에 모시고 아내는 죄스러운 마음자리에 묻었다. 4남매 중 먼저 간 우리 아들은 애통한 자리에 묻지도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날처럼 가혹한 날은 없다. 어느 누구도 그 시간을 피해갈 수 없다면 우리 인생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면서 지나온 그 길을 한번 돌아본다.

■ 청년기의 결핍, 인정으로 채우다

면 단위에서 모든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사람은 사실 드물다. 나는 그 흔치 않은 기록의 보유자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38년 1월29일 태어난 나는 6남매로 자랐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장남 부채의식이 있었다. 내 것을 모르고 자라던 어린 시절, 우리 6남매는 가난했지만 서로 정을 부비면서 부족함을 채웠다. 일등이 이식이 일선이 일수 기한이 이한이 종말이 얼마 만에 불러보는 우리 형제들 이름인지.

묘금리에서 청산중학교까지 30리를 걸어 다녔다. 새벽밥 먹고 책보를 둘러매고 학교에 가려면 2시간 넘는 시간을 걷고 또 걷는다. 하교 후 돌아오는 길도 걷고 또 걷는다. 저녁이면 지쳐서 돌아와 공부는 뒷전이다. 5시간을 왕복하는 거리, 돌도 씹어 먹을 때지만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기도 어려웠지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겨낼 장사가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고속도로 개통 후 1년 만에 전기가 들어왔다, 내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다. 이장을 보던 친구와 같이 한전 심천 출장소에 가서 읍소를 하고 전기를 끌어들였다. 학창시절에는 전기 구경도 못 했지만 고속도로 개통 후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곳곳에 전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골마을들이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기 들어오는 날은 온 마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2년간은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아버님이 월사금 낼 돈이 없어 중학교에 바로 갈수 없다고 하셔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어린 마음에 입술도 깨물어보고 애꿎은 물수제비도 떠보았다. 2년 후에 급우들보다 두 살 더 먹은 형님으로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형님들도 학교에 다니고 아이 업은 누이도 학교에 다녔다. 제 때에 제 나이에 인생의 단계를 밟는다는 건 그래도 살만하다는 반증이었다.

옥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은 내 형편에 그림의 떡이라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했다. 청성면 소서리 사는 송순애를 중매로 만나 신랑 각시가 되었다. 아내는 이름처럼 예쁘고 순했다. 피 끓던 청춘, 순애는 내 마음에 불을 지펴 나는 색시를 품에 안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신혼의 단꿈에 젖을 시간도 없이 나는 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 혼자 조부모 시부모에 시동생들까지 거기에 농사도 손을 보태야 하고 21살의 여인네는 하루하루가 그저 고단하고 외롭고 힘들었다.

키 크고 훤칠했던 나는 헌병으로 차출돼서 강원도 양구 화천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21살의 젊디젊은 청춘에게 강원도 첩첩산중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휴가 한 번 나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첫 휴가, 화천에서 군용트럭을 타고 우리는 어둠을 뚫고 춘천역에 내렸다. 날이 밝아오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내린다. 이미 한나절이다. 용산역 출발 군용열차는 옥천을 지나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에 영동역에 정차했다. 새벽에 출발한 나는 이미 깊은 어둠에 불빛도 찾아보기 힘든 영동역에 내려서 청성 묘금리까지 3시간 동안 걷고 또 쉼 없이 걸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기 바짝 들었지만 산속에서 서낭당을 지날 때는 뒷목이 쭈뼛하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저 멀리 작은 불빛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내가 밝혀둔 호롱불이다. 깊은 밤, 아내를 한 번 안아보는 것도 꼬박 하루 걸린 그 고단한 여정의 황홀한 마무리였다. 나에게도 그런 청춘이 있었다니…. 이른 아침, 온 가족이 툇마루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었다. 다들 재빨리 숟가락을 놓고 할머니가 먼저 “○○야, ○○야, 마실 다녀오자.”라며 마당 한가운데서 집에 있는 조카와 동생들을 불러냈다. 아버님과 어머니도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셨다. 아침부터 다들 바쁘다. 시골의 일상이기도 했지만 모처럼 휴가 나온 내가 아내와 단둘이 회포를 풀 시간을 어른들이 배려해주신 것이다. 아내와 정을 나누는 그 꿀맛 같은 시간을 가슴에 품고 나는 이른 점심을 먹고 아내와 눈도 못 마주치고 다시 군대로 들어갔다. 등에 꽂힌 아내의 아쉬운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치열하고 성실했던 촌부의 젊은 날

2021년 4월에 104세 어머니를 떠나 보낸 날

■ 건실한 농사꾼으로, 마을의 위원장으로 허투루 살지 않았다

제대 후에 아버지 농사를 도와 새로운 영농법도 개발해서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농사박사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도열병이 한창이던 때라 벼가 튼튼하게 자라는 수확방법이 절실하던 때다.

농사만 지어서는 아이들 월사금 낼 때 마다 전대를 뒤지고 또 뒤져야 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우리 마을 근방에도 고속버스 정류장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갔다. 아내가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뻑뻑한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닫는 구멍가게. 막걸리도 한 잔 마실 수 있고 요모조모 필요한 생필품들이 소소하게 구색을 갖췄다. 개인 차량이 없을 때라 대전 가서 물건을 뗀 후에 고속버스로 물건을 실어왔다. 1970년대는 고속도로 개통 후에 고속버스가 대중교통의 선진화를 이끌고 있었다. 당시 주름잡던 고속버스는 ‘그레이하운드’, ‘한진고속’ 등이었다. 고속버스가 묘금리에도 정차해서 가게 물건을 수월하게 날랐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에서 들어온 2층 버스로 화장실까지 갖춘 대단한 버스였다. 낑낑거리며 물건을 들고 오면 기사님들이 손을 보태서 차 트렁크에 짐을 실어주기도 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사람 냄새나던 그 시절을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다. 제사만 지내도 동네사람 다 술 한 잔씩 돌리던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한다. 묘금리도 80호 정도 적지 않은 마을이었고 내가 다니던 청산중학교도 운동장에 아이들이 꽉 들어찼던 호시절이 있었다.

한창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시골 마을의 취락구조 주택개량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나는 마을에서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집집마다 130만 원가량 보조를 해주지만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돈들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추진위원장인 내가 할 일들이 많았다. 취락구조 사업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동네는 길을 내게 된다. 취락구조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한동안 좁은 소롯길을 다녀야했을 것이다. 마을 이장도 보면서 우리 묘금리가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을 실천하는 역할을 해냈다.

아직은 4시에 거뜬히 일어나고 있다. 그때부터 움직여 7시 25분 첫차를 타고 복지관 노인 일자리 일터로 출근한다. 한창 수업을 많이 들을 때는 일본어 중국어 풍수지리학까지 배우고 싶은 것들을 죄다 배우기도 했다. 나이든 시골 노인이 무료하지 않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서 좋은 시절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다. 혼자만 누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아내 몫까지 알토란 같이 살아야 한다. 훗날 아내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날을 위해 나의 하루를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채워가는 중이다.

인간 속에서 부귀공명을 해탈하고 청정(淸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이백의 ‘경정산에 홀로 앉아’라는 싯구가 작금의 내 마음으로 스며든다. 소리없이….

어머니 돌아가시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간략하게 적어본 나의 흔적들

경정산에 홀로 앉아

이백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진 푸른 하늘에

한 조각 하얀 구름 유유히 떠서 흐르네

서로 마주 보아도 물리지 않음은

오로지 경정산 너뿐인가 하노라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