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사람>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중도일보호(號)에 승선한 언론인으로 33년

김경희 작가 승인 2022.04.07 14:11 의견 0

계족산 산자락에 봄이 몰려오고 있었다. 꽃망울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고 바람결에 묻어온 풀 향기도 이미 겨울의 흔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여기요, 봄이에요!”라고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자기 몸집보다 갑절은 큰 종이 상자를 앞에 두고 봄 여인이 앉았다. 상자 안에서 딸기, 사과, 커피가 줄줄이 나온다. 주섬주섬 챙겨서 한 손씩 안겨주신다. 봄을 통째로 가져다 준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중도일보 국장을 역임 중인 그녀의 통 큰 인심에, ‘역시 큰 그릇은 다르구나…….’

동네 사람 이름을 다 지어주신 마을의 어른이자 한학자셨던 할아버님이 지어주신 걸쭉한 이름, ‘成一’. 이름값인지 언론인으로 33년을 걷고 있다. 간간이 풍파도 밀려오고 갈등의 시기도 있었지만 천직인 듯, 한 길을 걸었다.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화석처럼, 중도일보에서 33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생을 듣고 기록으로 남겨드리는 취재현장이 내 삶의 현장이다. 짜릿하고 보람은 덤이다. 기자 생활 33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어느새’라는 말로 말미를 흐리곤 한다. 기자 초년생으로 시작해서 국장의 자리까지… 운이 좋아 24살에 입사하고, 26살에 결혼, 28살에 첫 아이를 낳고, 31살에 둘째 아이를 낳고, 충전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삶에 이벤트들이 마련되었다. 힘든 시기가 찾아오면 내 인생의 골목골목마다 외부로부터의 충전을 통해 이겨내고 그 과정에 새로운 에너지가 장착되어 33년 동안 무르익었다.

언론인으로 서른하고도 세 해를 넘겼는데 발전과 성장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무기력의 올가미에 갇힌 적이 없이 한 길을 걸어온 것을 보니 내 인생의 멘토이신 아버님의 선택이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중학교 영어 선생님을 40년간 역임하시고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님은 나의 멘토셨다. 대학 진로부터 입사 선택까지…….

아버님은 내가 대학 졸업하던 해 바로 나에게 중도일보 입사 시험을 권유하셨다. 자기 결정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선택은 늘 옳다고 느끼면서 성장했던 나는 나의 멘토 아버님의 권유였기에 당연한 수순처럼 국어, 영어, 상식, 논문 시험을 치렀고, 3차 면접까지 치르면서 중도일보 편집국 공채 6기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여성이라는 올가미가 두텁던 시기에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왠지 그럴싸한 사회 초년생 ‘한성일 기자’는 내근 기자로 별다른 우여곡절 없이 기자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교열기자로 독서도 즐기고 훌륭한 선배님들과 교류하면서 젊은 날은 훈풍을 타고 흘러갔다.

매너리즘에 빠질 만 할 때마다 내 인생의 변곡점들이 생겨 무리수를 동반하지 않고 그 시절을 넘기고 외근 기자로 바깥 활동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기자가 천직이듯이 ‘중도일보 기자 한성일’로 내걸은 이름에 흠집이 나지 않았다.

중도일보는 올해로 창간 71년을 맞는다. 1951년 8월 24일 고 이웅열(李雄烈) 회장님이 창간한 이후 ‘대전일보’와 함께 충청남도에서는 양대 지방지로 쌍두마차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일도일사 정책에 의해 1975년 5월 25일 ‘대전일보’에 흡수·합병되어 ‘충남일보’가 되었다. 1988년 9월 1일 지령 7,071호로 속간되었고 1994년 조간으로 전환하였다.

중도일보는 2003년 3월 8일 경영난으로 임시 휴간했다가 2003년 9월 8일 지령 11,520호로 재창간했다. 역사의 파고를 넘나드는 시대의 흐름에 가장 민감한 언론사는 순항만 할 수 없다. 3개월간 월급을 못 받는 안타까운 현실도 맞이했지만 그 이유만으로 회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언론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불가피한 여건들은 어디든 존재한다.

교열부 10년, 편집부 3년, 36살에 문화부 외근기자가 되었다. 간간이 주어지는 해외 취재는 숨통을 트는 돌파구가 됐고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동물이라 외근기자가 되면서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다. 언론인으로서의 순기능이 발휘되는 시점을 맞았다.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목요언론인클럽의 회장 취임까지

목요언론인클럽은 차장 시절에 가입을 했다. 관례는 언론사의 국장급이 목요언론인클럽에 가입하는데 나는 예외조항처럼 차장 시절에 클럽에 들어가는 행운이 주어졌다. 고 길쌍석 목요언론인클럽 회장님의 신임이 매우 두터운 덕분이었다. 선배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막내로 들어가서 입회한지 20년, 역대 회장을 역임하신 선배님들의 회장 추대로 영광스러운 회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회장은 언론사 사장급 중량에 맞먹는데 국장에게는 무거운 짐이라 여러 번 고사를 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책임감과 함께 목요언론인클럽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으며 사명감도 더해졌다. 목요언론인클럽 창립 41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이 됐다. 창립 이후 최초로 목요언론인클럽 자문위원회를 결성했고, 매달 회원들 생일 파티를 해드리고, 농촌으로 자원봉사활동도 가고 있다. 신입 회원들도 대거 영입했다. 지금도 현직 기자들이 들어오겠다고 줄을 서서 대기중이다. 대전세종충남기자협회와도 연대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됐다. 선배님들은 목요언론인클럽이 활기찬 부흥기,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회장을 도와주시는 부회장님, 사무총장님, 홍보이사님, 간사님 덕분이다. 매우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목요언론인클럽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강제 퇴직 당하신 언론사 선배님들이 주축이 되어 81년 해직자 친목회인 목요회로 결성되었다. 차후 현직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2000년 초에는 공익 사단법인체로 등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요언론인클럽은 현직 기자들에게 분기별로 ‘이달의 기자상’을 시상하고, 연말에는 목요언론대상과 언론인자녀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지역 언론인에게는 가장 영예스럽고 자랑스러운 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장에서 열심히 뛰며 정론직필을 위해 애쓰는 언론인들이 그들의 의무와 권리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목요언론인클럽이 독려하고 있다.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는 해라서 목요언론인클럽이 주최하는 후보자 초청 토론회도 준비중이다.

목요언론인클럽 임원진 양승조 충남도지사 방문

정론직필 그 너머의 감동, 그리고 사명감

매주 월요일자 9면 중도일보에 ‘한성일이 만난 사람’을 9년째 연재하고 있다.

‘피플 라이프’, ‘휴먼 스토리’를 거쳐 국장 승진 이후에 ‘한성일이 만난 사람’으로 진화하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 당시 이슈가 된 인물 등을 중심으로 기사를 만든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는 이 지면이 나를 언론인으로 바로 세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섭외를 직접 하고 취재하고 사진 찍고 기사 쓰는 어려움을 동반하지만 수고를 담보로 한 만큼 보람도 갑절인 지면이다.

하고 싶던 말을 신문 매체를 통해 털어놓는 기회를 갖게 된 분들의 말씀을 듣고 기사를 쓰다 보면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배가시켜주신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취재해서 기사를 써드렸던 분의 문상 자리에 내가 만들어드린 기사가 단정한 액자 안에 담겨 먼 길 떠나시는 그 분을 배웅하고 있는 현장을 봤을 때는 뭉클한 감동에 젖게 된다.

도전, 에너지와 힘의 원천

성지순례 기사를 쓰면서 또 한 번의 감동을 만났다. 평화방송 사장 신부님을 지내신 김정수 신부님과 함께 하는 성지순례는 엄숙한 신앙 여정과 숨은 비화들을 접할 수 있어서 순례부터 집필까지 설렘과 진지함을 동반한다.

석사 논문도 ‘김수환 추기경의 언론활동과 언론관에 관한 연구’로 쓰게 됐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셨을 때 대학원 은사님인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이승선 교수님께서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논문은 세계 최초이니 써볼 것을 권해주셨다. 김수환 추기경이 명동성당 계실 때 비서신부셨던 김정수 신부님이 김수환 추기경의 전집을 10권이나 빌려주시며 도움을 주셨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쓴 최초의 논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김수환 추기경연구소에도 논문이 보내졌고, 가톨릭신문에서도 논문 관련 기사를 다뤄주셨다.

박사 논문은 그때당시 방송통신위원장이셨던 성균관대 언론정보 고위과정 지도교수님 이효성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페이크 뉴스(가짜뉴스)를 다루었는데 ‘허위조작정보의 규제에 관한 연구’로 전문가 열네 분의 심층인터뷰를 분석한 논문이다. 완벽주의 지도교수님과 심사위원 교수님 덕분에 결과물은 좋았지만 박사 과정 3년 반 동안 신문사 활동하면서 새벽까지 공부하느라 힘든 날들이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처럼 영어시험, 종합시험, 중간발표에 이어 논문 쓰고 1차 심사, 2차 심사, 3차 심사까지 이어지는 험난한 과정들이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논문이 최종 통과되기까지 눈물이 앞을 가리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석사 박사 논문 모두 나에게는 도전과 용기가 없으면 이룰 수 없던 결과물이었다.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도전은 박사논문에서 멈추지 않았다.

최근 건강과 에너지를 모으는 툴로 다이어트에 도전했다. 바디프로필을 당당하게 찍을 만큼 성과를 냈고 6개월 동안 피트니스클럽에서 트레이너의 지도 아래 운동과 식단 조절로 77사이즈에서 44사이즈로 나를 변화시켰다. 17층 아파트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리고 하루 2시간 30분의 운동, 고구마와 단호박, 삶은 달걀, 닭가슴살과 야채샐러드, 아몬드, 파프리카, 브로콜리 등의 식단으로 6개월 동안 25킬로그램을 뺐다. 살인적인 과정.

살이 빠졌다는 단순한 결과보다 혹독한 과정을 이겨내고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성과물이 흡족하다. 체력이 좋아지니까 지치지 않고 당연히 일의 능률도 오른다.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한성일, 그녀는 지금 다시 화양연화

오후 11시 20분, 전화선을 타고 “저 지금 운동 마치고 집에 들어가요.”

잠을 잊은 그녀의 아침이 오히려 더 쌩쌩할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동년배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함께 사는 86세의 시어머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계실지, 아니면 주무시고 계실지 궁금하다. 진부하지만 효부라는 말로 그녀를 한 번 더 추켜세워 본다.

24시간을 꽉 차게 쓰는 그녀의 ‘내일’에 내가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일은 왠지 그녀가 44사이즈 핑크빛 트위드재킷을 입고 출근하지 않을까.

봄을 몰고 다니는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

지치지 않는 아름다운 도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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