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이대자 1952년생―추억의 서랍장, 한 칸 한 칸 그리움을 꺼내보며

김경희 작가 승인 2022.05.11 14:20 의견 0
이대자 1952년생 약혼

<장수만세!> 1970년대 중반 인기리에 방송됐던 프로그램이다.

70이 넘은 어르신을 모시고 살던 가족들이 출연해서 경로사상도 고취하고 가족애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호호백발이던 어르신들은 고희를 넘긴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두보가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했던가.

수백 년이 지나고 우리는 진화하고 성장하면서 고령화라는 시대의 부산물을 낳았다.

이대자 어르신, 70이 넘으셨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내가 뭐 할 말이 있나…….’라고 수줍은 말을 건네셨지만 조근조근 풀어내는 그녀의 70년도 휘몰아치는 시대의 풍랑을 견뎌왔고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비록 무명인이었지만 긴 세월 속에서 그녀의 역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점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들의 평범한 삶을 존중해야 한다.


우물 길어 먹던 우리 동네, 마을 주차장 초입부터 번듯하다

가풍리에서 태어나 대전에서도 터를 이루고 살다가 결혼하고 백운리에 45년 전에 정착했다.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주름이 생기고 식구가 늘어나듯이 내 삶도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 우리 동네 백운리도 한 해 두 해 좋아졌다. 우물 길어 먹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다. 동네 형님들 이야기 들어보면 나 살던 시절은 양반이지만 여하튼 우리도 적잖이 고단한 인생의 강을 한두 번씩은 건넜다.

25살 결혼 전까지는 6·25직후 태어난 계집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처음에 백운리에 들어왔을 때 물설고 낯설던 동네가 이제 내 안방처럼 아늑하다. 부지런하기로 대한민국 1등인 이장의 분주한 확성기 소리로 시작하는 하루가 우리 시골마을을 활기차게 만든다. 그런데 그 에너지원인 이장의 나이가 내일모레면 일흔이다.

곧 70의 나이가 새댁 소리 듣는 지금의 시대를 복이라 해야 할지 재앙이라 해야 할지…….

70년, 별로 자랑거리도 없는 지난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찾아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남편 만난 추억도 오랜만에 꺼내 보고, 미아전기 다니던 그 시절 이야기도 꺼내놓으니 서랍장에서 추억 꺼내듯이 새록새록 이야깃거리가 하나둘씩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70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났지만 우리 세대도 어머니의 고생을 눈으로 지켜보았고 우리들의 하루하루도 썩 예쁜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고단했던 그때도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지금’이 나를 위로하고 있다.

아직 할머니 소리 듣기에 이른 나이지만 그래도 삶의 모퉁이마다 박장대소도 하고 쓴웃음도 지으면서 그러그러하게 살아왔다.

초가집 일색이던 신혼 시절의 백운리는 지금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동네가 되었다.

집 텃밭에 고추, 파를 오종종 심어놓고 손발을 놀리며 소일도 하고 식구들 먹을거리로 밥상에 올릴 수 있어 제법 효자 노릇을 한다.


그리움의 보고(寶庫)… 걸쭉한 이름 6남매, ‘대’자 돌림

이대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이름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름 하나는 거창하게 지어주셨다. 이대자, 뭔 대업을 이루라고 아버님은 대자라는 걸쭉한 이름을 지어주셨는지.

우리 형제는 6남매, 대식 오빠, 대순 언니, 나, 남동생 대원이, 대만이,여동생 대희……. 오랜만에 형제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춰보니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 6남매 키우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 생각하니 눈물이 고인다. 그 척박한 시절을 우리 어머니들은 어찌 살아내셨을까. 나와 동년배인 여인들이 남자 형제들에게 이런저런 기회를 양보하는 게 미덕인 줄 알고 살던 시대를 겪느라 우리는 학교 다니는 기회를 남자 형제에게 양보했다. 학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어머니 속앓이하실까 내가 속앓이를 하고 넘기곤 했다. 나는 그나마 큰 고생 안 했지만 우리 집 맏딸 대순이 언니가 고생 많았다. 처녀 시절부터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인삼을 떼어다가 장사하면서 어머니를 돕고 동생들을 챙겼다.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언니의 지친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비단 우리 언니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맏딸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어깻죽지와 마음 골이 다 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살면서 간간이 힘들다고 혀를 꽉 깨무는 날들이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오죽하였을까. 동네 형님 중 구순이 가까운 분들은 그리움이 화석이 된 어머니를 다시 불러와 주신다.

우리 부부 뜨겁던 청춘


우리 세대, 이름 없는 산업역군으로 점 하나 찍다

우리 때만 해도 청산은 큰 동네였다. 백운리 여인들은 판수리 만두 공장에도 다니고 나는 하서리 가는 길에 미아전기에 다녔다. 동네 사람 여럿이 삼삼오오 다녔는데 미아전기에서는 전기 가로등을 조립했다. 내가 하는 일은 납으로 전기선을 때우는 일이었는데 빨간 선, 파란 선을 꼬아서 다음 라인으로 보냈다. 큰 기술은 필요 없었지만 그 작업들이 모여서 동네에 가로등을 세웠다. 시골 아낙들의 평범한 수작업이 마을을 밝히고 세상도 조금씩 환하게 진화시켰다.

우리 삶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대단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품이 모여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아이들 한창 육아할 때라 동네 친구들과 1년만 다닌다는 게 미아전기는 3년 정도 다니고 나와서 용산의 풍한방직에 오래 다녔다. 8년 6개월을 다녔다. 아마도 농사짓는 것보다 덜 힘들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근방에 막국수 공장 가발 공장도 있었다.

다들 호구지책으로 다니던 공장이었지만 그렇게 전깃불 아래서 꾸벅꾸벅 졸아가면서 식구들 먹이고 동생들 가르치던 그 누이들이 바로 우리들 세대다. 천하장사도 이길 수 없는 눈꺼풀이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꼼짝없이 무너질 때는 도리가 없다. 잠깐 졸음을 만나는 사이에 사고도 당하고 시름도 덩달아 잊었다. 그 틈에 시골에서 이름 없이 살던 우리도 산업역군으로 점 하나씩 찍었다.

신혼 초에는 남의 집 셋방살이하느라 아이들 키우면서 짐 보따리 들고 백운리 지전리 옮겨 다니면서 설움도 키워보았다. 그렇게 몇 년 살면서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하고 아껴 쓰면서 내 집을 마련했다. 셋방살이 서러웠는데 내 집 마련하고 첫날밤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기 방을 가진 우리 아이들이 신이 나서 이불 위에서 뛰어노는 소리가 안방까지 들릴 때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격스러웠다. 하나하나 쌓아가는 희열은 과정이 힘들지만 결과는 참으로 값지고 귀하다. 그래서 인생이 버릴 게 없다. 희로애락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오히려 덧없다.

젊은날 단란한 한 때


추억의 서랍장

남편은 천생연분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인연이 중신을 했다. 우리 때는 여자들이 길을 걸어가면 남자들이 호기롭게 말을 걸어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했는데 드라마 장면이라면 참 촌스러운 장면이다. 발그레한 뺨이 복사꽃 같던 그 시절, 남편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저……,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라고 말을 걸던 그때가 45년 전이다. 무심한 듯 흘러왔지만 우리 부부는 더 견고해졌다.

남편의 프러포즈로 대전 동아예식장에서 결혼하고 옥천으로 들어왔다. 동아예식장은 세월 속에 사라졌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새로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상은 끊임없이 운행을 한다.

남편은 인물도 훤하고 자상한 사람인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작은아버지가 양조장에 계셔서 잠깐 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수락하고 발을 들여놓았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술 한 말을 지고는 못 가도 먹고는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남편은 애주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후.

우리는 늘 예정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된다. 남편과의 만남도 ‘어느 날 우연히’로 시작되었지만 천생연분이다.

우리 때는 장티푸스가 가장 무서웠는데 지금은 손주들도 제대로 못 만나는 세상이니 더 무서운 녀석이다. 아기들이 마스크 쓰고 다니는 걸 보면 안쓰러운 마음에 한 번씩 더 쳐다보게 된다.

뉴스에서는 어디서 전쟁을 한다느니, 코로나 환자가 몇 명이라느니…… 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 코로나라는 녀석인데 말이다. 머리가 아프지만 한적한 시골 동네에 살다 보니 이런저런 속 시끄러운 세상살이에서 조금은 해방되는 자유로움이 있다.

그저 텃밭의 아이들을 돌보고 환경오염이 재앙 수준이라는데 아직 숨을 들이켜면 맑은 공기가 온몸을 휘감고 고개를 들면 청명한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는 우리 시골마을이 천국이 따로 없다.

이런 저런 시름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일상을 누리는 이 평범한 하루가 여느 때보다 더 귀하다. 위기가 기회이며 결핍이 사람을 성장시키듯이 어수선한 이때가 내가 사는 작은 마을에 더 감읍한 마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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