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림의 퇴직 rebooting] 농업인 박종원 (1974년생)

이 시대 마지막 유생(儒生), 쫓기는 회사생활에 사표 내다

정여림 작가 승인 2022.06.07 14:31 | 최종 수정 2022.06.07 14:33 의견 0
농업인 박종원 (1974년생)

“귀농하니 이제야 내 자리… 논길 걸으면 행복하다, 내 마음에 드는 내 노래 부른다.”

지난 2018년, 충남 논산군 노성면의 본가로 귀농한 유학자의 아들 박종원 씨. 강남에서 직장 생활을 안 해봤다면, 농사를 짓는 지금 갈등이 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러 직장을 겪었기에 미련이 없고 갈등도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절에 동자승으로 자라 도통한 스님은 없다’고. 사회를 겪을 만큼 겪고 산전수전 치러봐야 고통으로 도가 통한다는 뜻이리라. 속세라는 곳은 가보면 고통이고 진흙탕이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병들고 앓다가도 성숙해진다. 그도 회사라는 속세에서 수련하고 깨달아 이제 고향의 품에 들었고, 편안해졌다.

벼농사 시작과 수확, 기계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진다.

“솔직히 귀농 초에는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토지를 구입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대학 졸업하고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내가 왜 진작 돌아오지 못했을까 싶었습니다.”

계분과 왕겨를 섞어 발효를 시키면 악취가 난다. 그는 퇴비 작업을 같이 하던 아버지께 말했다. 5년 전만 해도 자신이 이런 냄새를 맡으면 뛰쳐나갔는데 이제는 아니라고. 그는 퇴사로 버린 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더 얻었는데, 그것은 ‘자유’라고 말했다.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수입이 어김없이 나오니 회사생활보다 어쩌면 경제적으로도 더 안정적이라 했다. 사실 아직 농사의 모든 기반이 갖춰지지는 않아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하우스 농사도 해보고 싶지만, 손으로 해야 하는 작업이 많아 아직 못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평균연봉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봅니다. 도시에서는 노인이 되면 할 일이 없는데 시골에서는 노인도 다 일할 수 있어 수입이 창출되죠. 긴 생애로 보면 수입이 비슷합니다.”

벼농사 시작과 수확, 기계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진다.

농사를 지으니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 누가 명령하지 않는 게 그는 너무 좋다고 했다. 복잡한 도시에서 운전하는 스트레스도 없다. 논길을 걸으면 행복하다. 회사생활 때는 노래방에 가서 정서에 맞지도 않는 신세대 노래도 불러야 하고 먹고 싶지 않은 술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노래를 부르고 선택할 수 있다. 요즘은 송가인 노래, 최향 노래가 좋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두 시에 누구, 세 시에 누구… 일정을 빽빽하게 잡는 게 잘하는 건 줄 알았다.

“하루에 한 사람 이상 만나지 말아야 해요. 한 4, 5년 전 아버지 친구분이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을 실천한 이후로 많이 충만해졌습니다. 매일 분주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농업인 박종원 (1974년생)

이 시대에 자취 숨은 명문 유가(儒家) 장손… 시대의 조류 보지 못해, 늦은 제도권 입학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순창, 담양, 광주 등지로 초청받아 훈장을 하신 명망 있는 유학자였다. 그의 아버지도 대를 이어 한학자로서 유학을 숭상하며, 현대 학교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는 면이 있었다. 장손인 그도 집안의 영향으로 초등 2학년부터 사자소학을 읽었다. 한문학자가 되고 싶었고 제도권 학교 코스를 밟기보다는 서당을 택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여군 은산면의 유서 깊은 ‘곡부서당’에 들어가 과외로 들어온 대학생들과 같이 공부했다. 전남 구례군에 초동서사(서당)에서도 만 4년을 공부했다며 그는 말했다.

“서당 공부에서 시경, 서경을 읽어도 가시적으로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 동기들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 되자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 보였습니다. ‘내 공부 방법이 잘못됐구나. 제도권 안에서 한문 공부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곡부서당에는 명문대 석박사들이 많이 와 그와 같이 공부했다. 그중 10여 명이 교수가 되었다. 23세에 그는 검정고시를 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만 2년 만에 통과하고 충남권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학에 대한 실망이 컸다. 중문학과 한문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학생은 수업 안 나와도 학점 나오겠네’라고 하셨다.

서당에서 정통 유학을 오랫동안 공부해 왔으니 교수님들이 부담스러워할 만했다.

한국벤처농업대 교수 학우와 함께

회사생활… 순식간에 바뀌는 트렌드, 쫒기는 시간, 구속된 자유에 ‘사표’를 내다

그는 명문 유가(儒家)인 집안 내력으로 어릴 적부터 한학에 투신했다. 뒤늦게 제도권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북경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전공 관련 직장을 찾다 보니 회사는 다 서울에 있었다. 거주하던 천안에서 직장인 서울까지 통근을 위해 아침 2시간, 저녁 2시간까지 버스를 탄 적도 있었다.

중국 관련 전자부품 에이전시에 근무했다. 하나의 제품을 출시해, 소비자의 손까지 닿아 선택받기까지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스트레스로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농산물유통 무역회사에서는 중국 담당을 했다.

직장 생활은 썩 유쾌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논산에 거주하고 그는 천안, 직장은 서울. 몸은 하나인데 한계가 느껴졌다. 유가의 최고 가치 중의 하나가 ‘효’다. 그는 장남이라 부모님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가 컸다. 한창 크는 딸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중국 손님이 들어 오면 동반 출장 등 오랫동안 집중해야 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벼농사 시작과 수확, 기계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진다.

그러다 2015년에 아버지가 쓰러지시니 사면초가였다. 그의 내부에서 각성이 일었다. ‘내 부모, 자식과 떨어져 혼자 하는 고달픈 서울살이에 국내와 중국으로 떠돌며 나는 뭘 얻었나? 이건 아니다! 이제, 내 삶을 논산·천안으로 압축하자!’

마지막 직장은 중국인 농업법인이었다. 사람이 먹고사는 식량산업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농업이 답이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2018년 1월, 직장을 접고 자칭 임시 백수가 됐고, 들녘으로 나갔다는 그가 설파했다.

“회사생활 중 제일 힘들었던 건 내 부모 내 아이가 아파도, 내가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고 가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노예가 아니고 뭔가, 구속된 내 필수적 자유에 대해 굉장한 스트레스가 있었습니다.”

농업은 상대적으로 안정적, 귀농인 지원정책으로 벼농사 시작… 평온을 찾았다

퇴직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우연히 귀농·귀촌 담당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귀농인 지원정책을 전해 듣게 되었다. 2018년 초부터 이를 준비하여, 2020년 하반기에야 지원금 대상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원금을 받아 논산시 노성면 일대 땅 4000평을 구입했다.

현재 그는 32마지기 논에 벼농사를 짓고 있다. 향후 그는 논을 더 임차해서 경작지를 늘리고 싶다. 100마지기를 지으나 200마지기를 지으나 기계로 경작하니 일거리는 해결된다. 벼는 이앙기가 심고 수확은 콤바인으로 탈곡까지 다 된다.

그는 쌀을 수확하면 인터넷판매, 지인판매로 소매한다. 2019년부터 지은 그의 벼농사는 그만의 비결로 쌀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작년에는 벼농사 대풍이 들었다. 아버지는 평생 농사로 200평 기준, 80kg 4가마 수확하셨는데 그는 5.7가마를 수확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벼농사 시작과 수확, 기계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진다.

그는 시골로 귀환한 후 마음이 편해지니 책이 손에 잡힌다며, 최근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한자 원문 ‘홍루몽’을 읽는다고 했다.

“저는 여기 홍까페를 자주 이용합니다. 집에 있으면 졸려 못 읽는 책을 여기서 읽을 수 있어요. 질문 사항은 중국의 친교있는 교수님께 문의해 놓으면 답신이 옵니다.”

그가 독서를 위해 자주 이용하는 마을 카페

<논어>의 첫 구절,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문구가 생각났다. 그는 진정,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기쁨을 아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농부’다. 남다르게 맑은 이마와 총명한 눈빛 이면에 비치는 왠지 모를 고독은, 빠르게 변모해 가는 세상에 사라져가는 유가(儒家)의 뒤안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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