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백의 복지 이야기] 복지란?

김동백 교수 승인 2020.01.06 15:52 의견 0

누군가 나에게 전공을 묻는다면 나는 자랑스럽게 사회복지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보통 그 다음에 오는 말이 ‘좋은 일 하는구나’이다.

 

그 대답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좋은 일. 복지는 왜 단순히 좋은 일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말이 좋지 않은 나는 복지에 대해서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다른 전공 친구에게 전공을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질문했을 때 그 친구는 웃으며 답했다. ‘그게 뭐 하는 거야?’ 대답을 듣고 재미있었다. 이런 질문이 되돌아 오는 게 차라리 좋았다.

 

누군가 나에게 ‘사회복지? 그거 대체 뭐 하는 건데?’ 라고 물으면 즐거울 것 같다. 상상 속에서 질문을 생각하고 답을 하려는데 좋은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내 입으로 좋은 일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인터넷에서처럼 삶의 질을 높이고 국민 전체의 행복을 높이는 거라고 말하기에는 질문하는 사람에 궁금증 해소에 부족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뭘 위해서’ 같은 질문을 뒤이어 받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사람다운 삶‘이다.

 

우선 앞서서 복지가 무엇인지! 그 정의를 찾아보는 작업을 대학교에 처음 입학한 1학년 때 공부한 기억이 남아있어서 전공책을 펼쳐보았다.

 

사람들이 복지에 대한 정의를 다양하게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나 또한 책을 기준으로 정의를 정리하고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사회복지의 어원적 의미는 복지(welfare)의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잘 지낸다는 뜻이며, 만족함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의미 복지(福祉)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뜻한다.

 

종합해 보았을 때 사회복지란 인간이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과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형성해주고,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원조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복지의 학술적 의미는 사회복지학자들의 정의를 종합해 보았을 때 사회문제의 해결 또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제도라고 개념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사회복지의 범위적 의미는 범위 기준에 따라 협의의, 광의의, 최광의의 사회복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협의의 사회복지는 흔히 사회사업, 사회복지사업이라고 부르며 사회생활상의 곤란 또는 장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 대상이 된다.

광의의 사회복지는 사회구성원 전체가 대상범주 최광의의 사회복지는 토목, 건축, 재정, 금융, 경찰, 군사 등 모든 영역을 포함하며 사회복지의 협의의 개념, 광의의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사회복지의 이념적 의미는 선별적 사회복지와 보편적 사회복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차이는 사회문제의 발생원인을 파악하는 관점에 있다.

 

선별적 사회복지 관점에서 보면 사회문제는 특정범주에 속한 사람에게서 발생하며 사회규범에 비추어 볼 때 예외적이고 개인의 결함, 사고, 불행한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선별적이고 개별적인 접근방법을 이용한 소극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보편적 사회복지관점에서 보면 사회문제는 사회체계의 불안정성과 불공평성에 기인하여 공공부문의 노력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집합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국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복지는 사회구성원 전체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와 개인이 함께 노력하며 만들어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내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삶이란 각자 개인의 기준에 맞는 행복함과 만족스러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함과 만족스러움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행복함과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함과 만족스러움을 찾아서 떠날 수 있는 기반,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복지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반은 개인보다는 국가의 역할이 클 것이라 생각하고 기반을 다진 후에는 개인의 역할이 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와 개인이 함께 노력하며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사회복지 세미나 중에 나왔던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며 생각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대답이 있는 반면에 배고프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현실적인 대답까지 다양하였다.

 

사회복지라는 뜻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다. ‘국민의 생활 안정 및 공중위생, 사회 보장 제도 등 복리(福利)를 향상시키기 위해 힘쓰는 일이나 그와 관련된 정책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복지는 ‘자선’을 생각하며 “시설이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흔히 우리는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고기를 그냥 주지 말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고기를 잡는 법만이 아니라 고기들이 살고 있는 바다를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 바다에는 많은 고기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하는 모든 복지사업의 저변에는 사랑이라는 복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영국에서 세계 178개국을 대상으로 국가 행복지수를 조사했는데 이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태평양 남서부 인구 23만의 나라 ‘바누아투’였다고 한다.

 

이 나라는 문명과 최첨단 기기도 없고 땅과 바다에서 필요한 것들을 모자라지 않게 얻으며 살고 있는 나라이다. 이렇게 물질은 행복과 특별한 연관이 없다는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100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이 중에서 몇 명이 어린이만 도와주어 행복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몇 명의 어린이가 행복해진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불행을 느끼게 되므로 현실에서 신데렐라는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작지만 모두가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지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들의 가난의 책임은 개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옳은가?

 

실례로 북한에서 굶주림에 힘들어하는 꽃제비 어린이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책임을 북한의 독재정권에 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과연 국가적 사회적 책임이 없는 것인가?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지난 성탄절에 김치 봉지 200개를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지난 1월에는 반찬을 담아 100명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김치와 반찬을 받은 분들이 과연 행복해 했을까?

 

그 분들에게 과연 김치와 반찬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주변에 이것을 받지 못해 기분 나빠하는 다른 이웃은 없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면서 우쭐대는 마음은 없었던가? 그리고 그들보다는 내가 만족을 느끼려고 겉으로만 봉사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

 

과연 그러한 일들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말씀에 합당한 복지사업인가?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했다.

 

신약성경의 산상설교에서 참 행복을 말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여기에 대하여 신학자들과 여러 형태의 논의들이 있으나, ‘모두에게 연대하여 공동선을 함께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 왔던 이웃사랑과 사회복지에 대하여 더 많이 이해하고 더 깊이 다가서고 더 함께 걸어가야 한다.

 

제주교구에서는 2008년부터 사순절에 2차 헌금을 모아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부르키나파소’에 학교와 병원과 지하수 개발 등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데 지난 1월 중순 정정이 불안하여 과격파 다른 종교인들이 공격으로 15개의 성당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무엇이 종교 간에 반목과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국가의 특정 종교에만 도움을 주는 것도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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