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흔들리는 허무 / 박재삼

박승일 승인 2020.02.05 14:57 의견 0

세상에는 온통

흔들거리는 것뿐인가

가까운 풀잎 나뭇잎이 그렇고

저기 물빛 반짝이는 것이 그렇고

머리는 山脈(산맥)들이 우쭐거리며

다가오다가 주저앉다가 하는 것이

영락없이 그 짓의 되풀이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몸짓도

결국 이 範疇(범주)에 드는 것만

이제 차츰 확인하고 나면

어쩐지 그것이

왕창 허무하다는 생각이다

 

 

박재삼은 슬픔과 허무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전통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는 그는 가난한 서민 생활의 고단함 또는 병고의 설움에서 비롯된 정서를 전통적 가락으로 다듬어 내고 있다.

물빛 반짝이는 것, 산맥의 머리들이 우쭐거리며 다가오는 광경,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몸짓마저 뿌리째 흔들거리는 허무의 범주에 들 수밖에 없다는 허무. 이것이 박재삼의 정과 한에 대한 회한이다.

 

 

박재삼 1933~1997

시집 춘향의 마음, 뜨거운 달, 찬란한 미지수, 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 비 듣는 가을나무, 해와 달의 궤적, 다시 그리움으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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