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달 특집] 육성으로 듣는 ‘내가 겪은 6·25’

김경희 작가 승인 2020.06.08 15:04 의견 0

◆ 김춘옥 어르신 (대전 대덕구 법동, 1929년생)

수류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온 가족

“펑, 와르르 펑, 와르르르 펑!”

변소 문을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등줄기는 빳빳하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집이 산더미 무너지듯 폭삭 내려앉고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너무나 놀란 나는 변소로 뛰어 들어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쥐고 서 있는데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 당장 내 몸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떼어 밖으로 나오니 조금 전까지 함께 둘러앉았던 가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막 발갛게 수염을 달고 나오기 시작한 옥수수 푸른 대에 오빠의 피 묻은 저고리 조각만이 척 걸쳐있었다. 파랗던 옥수수 밭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게 우리 가족과의 마지막 기억이며 전쟁의 상흔은 그토록 처참하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 동네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가리산 벽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제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부모님과 언니, 오빠랑 하루하루 연명하며 그럭저럭 평안히 살고 있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우리 마을은 누가 내세워 추진한 바도 없는데 자연스레 공산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와 친척들은 공산주의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은밀히 남쪽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셨고 우리 삼남매에게 단단히 이르셨다.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오늘 밤 12시가 되면 집을 나설 것이니 어른들 놓치지 말고 뒤를 잘 쫓아오도록 해라.”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말씀이었다. 이르시는 대로 옷가지만 보자기에 싸고 신발이랑 치마저고리를 단단히 여며 입고 때를 기다렸다. 그 날은 정월 대보름날이어서 여기저기 쥐불놀이로 불꽃이 번쩍번쩍 했고 아이들 소리로 시끄러웠다. 우리는 나물에 오곡밥을 하여 배를 채우고 떠날 채비를 했다. 곳곳에 인민군들이 보초를 서고 있어서 아버지는 총만 안 맞으면 되니까 소리 내지 말고 뒤를 따르라고 했다. 정월대보름달이 비추는 겨울밤은 환했다. 동네를 벗어나 산길을 걷기까지 긴장감과 공포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고개를 두 개 넘도록 인민군에게 걸리지 않고 걸어서 걸어서 무사히 서울까지 탈출할 수 있었다. 어딘지도 모를 여인숙에 들어서니 겨우 안도의 숨이 나오고, 동상에 걸려 벌겋게 부어오른 손발이 그제서야 가렵고 피가 났다. 눈길에 신발도 젖고 저고리도 젖어 달달 떨려 왔는데 여인숙의 뜨끈한 방에 몸을 녹이니 살 것 같았다. 아침으로는 겨우 한 숟가락의 밥을 얻어먹었다. 이제 살았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우리들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목숨을 건진 안도감과 짐작할 수 없는 미래의 두려움이 얼기설기 겹친 한숨들이었다.

우리는 충북 회인에서 6·25 사변을 맞게 되었다. 북한이 부산까지 점령했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큰 도로는 피난민들로 북적였다. 우리 가족도 피난길에 올랐다. 강원도 인제를 떠나온 지 2년 만에 또 정처 없는 길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모두가 먹을 게 없으니 칡을 캐서 먹고 소나무 껍데기를 두들겨 물에 담갔다가 즙을 내어 개떡을 쪄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난민 중 누군가가 보따리를 풀었는데 그 안에 수류탄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궁금하여 한 번씩 만져보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나는 변소를 다녀오겠다 말하고 삽짝을 돌아 밖으로 향했다. 막 변소를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펑” 하며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내가 돌아봤을 때는 이미 집 한 채가 검은 연기만 뿜어 올리며 폭삭 주저앉은 상황이었다. 순간 까마득하였다. 귀가 멍해지며 아무 생각이 없었고 내 몸은 자동적으로 변소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무너진 집 안에는 아버지도 계시고 어머니도 계시고, 언니, 오빠, 사촌들도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 가봐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무나 무서워 사시나무 떨 듯 손이며 입이며 발이며 마구 떨기만 했다. 한참을 그리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와 식구들을 찾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빠의 찢어진 옷자락만 빨간 핏물을 묻힌 채 옥수숫대에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사고는 한순간에 이루어졌고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미친 듯이 소리소리 지르며 고샅을 뛰었고 엉엉 울었다. 한 순간에 온 가족을 잃어버렸다. 1950년 7월의 태양이 산천을 뜨겁게 달굴 때 나는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 곽중도 어르신 (충북 옥천 평곡리, 1941년생)

곽종도 어르신 댁

전쟁 통에 묻혀버린 소년의 꿈

내가 3학년 때 검정 운동화 배급이 나왔다. 모든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돼서 심지를 뽑아 다섯 명에게 주었는데 운이 좋게 당첨이 됐다. 열 살 꼬마가 처음으로 세상을 다가져 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아끼느라 못 신고 실겅(시렁: 물건을 얹어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에 걸쳐두고 신주 단지 모시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운동화가 잘 있는지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렇게 아끼던 운동화를 신어보지도 못하고 그만 6·25가 발발했다. 시골 아이의 설렘도 전쟁 통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어려운 고비를 견뎌내야만 했다.

내가 열 살 때 6·25가 발발했는데 어머니는 위험을 느꼈는지 시집 간 큰 누나가 사는 동이면 조령리로 형님과 나를 피신 시키셨다. 귀한 아들들은 꼭 살아야 한다고 하며 젖먹이를 두고 있던 큰 누나를 불러 우리를 데리고 골짝 넘어 피난을 시켰다. 피난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누나 집으로 갔지만 돌아오는 길도 죽음을 담보로 한다. 할아버지는 난리 통에 귀한 손자들이 혹여 집으로 못 돌아올까 염려되어 동네 노인 두 분에게 쌀 닷 말 줄테니 우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집으로 오는 길, 인민군들이 대낮에는 세산리 아카시아 숲에 지프차를 박아놓고 하모니카 불며 놀고 야간에는 총소리로 공포에 떨게 했다. 수박을 따다가 주먹으로 깨서 우리에게 주기도 했다. 밤이면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한낮의 행태는 너무 낯설었다. 이념을 몰랐던 우리에게는 너무 생경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2주정도 피난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피난 간 큰 누나 동네가 폭격으로 모두 다 사망했다는 잘못된 소문에 우리가 죽은 줄 알고 바로 졸도하셨는데 일어나지 못하시고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결국 6·25가 열 세 살의 나를 어머니품에서 뺏어가며 나에게 가장 큰 비극을 남겼다.

 

◆ 송성자 어르신 (옥천 이원면 , 1944년생)

살아남는 게 양반인 피난길

그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가 유난스러웠어. 1·4 후퇴 때 꽝꽝 언 임진강을 다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었지. 일곱 살 꼬마였던 나는 아버지 목말을 타고 끝 모를 피난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비명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아, 이런 어쩌면 좋아. 얼음이 깨진 틈으로 엄마와 애기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 애기는 자지러지게 울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그 모자(母子)를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목숨을 내놓고 그 모자를 살릴 용기를 내기에는 피난길에 우리 명줄이 달려있었거든. 우리는 다들 비겁할 수밖에 없었지. 우리가 살아야 하니까. 도망치듯 그들과 멀어질 때마다 아이 울음소리에 한동안 밤마다 환청에 시달리곤 했어.

물에 빠진 아기가 파란 명주옷을 입었던 기억이 나. 입성은 부잣집이었지만 전쟁 난리 통에는 그저 목숨 부지하는 게 양반이야.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내 손을 꽉 잡고 성큼성큼 앞서가셨어. 재봉틀을 끌며 아버지를 따르는 어머니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물에 빠진 아이와 엄마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시다 나중에는 앞만 보고 가셨지. 더 이상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으셨을 거야. 나도 울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어. 그 때를 생각하면 그 시절을 살아온 게 그저 용해.

더 비통한 목격담은 아기 엄마는 폭격을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데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빨며 보채고 있는 거야. 싸늘해진 시신도 엄마젖은 한동안 체온이 남아 있었을까. 일곱 살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며 애통한 일이라 할머니 소리 듣는 나이가되었지만 그 때의 일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해.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남을 도울 수 없는 그 길을 지나온 우리는 비겁할 수밖에 없는 비극에 한동안 말없이 그저 울 수밖에 없었어. 서로 그 모자(母子)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 누군가 한마디라도 하면 눈물이 쏟아졌거든.

아버지는 나에게 “성자야, 눈 딱 감고 아버지 머리 꼭 잡고 있어야 한다. 아버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아버지 놓치면 큰일 난다.”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신신당부하셨어. 눈앞에 펼쳐진 피난민행렬은 끝을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든든한 목말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위안이었지.

우리는 피난열차 뚜껑 위에 벌떼처럼 붙어서 지붕에 매달려 간신히 대전역에 내렸어. 지금 대전역 동광장 길 건너 동네가 소제동인데, 이북에서 나온 철도국 사람들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지. 우리는 창고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한 장씩 던져주는 가마니를 장판삼아 이불삼아 그 겨울을 나야만 했어. 1·4 후퇴 겨울바람은 뼛속까지 비집고 들어와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가마니 한 장으로 막기에는 숨이 턱턱 막히고 손끝까지 다 얼어붙는 거 같았어. 그저 목숨 부지하면 양반이라는 생각에 그 시절을 견뎌냈지. 맨 바닥에 가마니 한 장 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눈에 쌍불을 켰지 뭐야.

피난 오는 도중에 허기진 배도 채울 겸 청국장 냄새에 주저 없이 어느 집으로 들어갔어. 부엌 아궁이 옆에 청국장이 냄비 째 그대로 있었지. 청국장만 끓여놓고 서둘러 피난을 떠난 빈집이었어. 우리 식구들은 허겁지겁 그 청국장을 먹고 배고픔을 달랬어.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청국장은 아직 맛보지 못하고 있지.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파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 때 먹었던 그 청국장은 피난길의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안이었거든.

간간이 남편한테 “여보, 피난길에 먹었던 그 담북장 맛이 안 나. 아무리 이 양념 저 양념 넣어 봐도 그 맛이 안 나네.” 하면 남편은 “우리 마누라 큰일 났네, 큰일 났어. 그 때 그 맛을 어떻게 흉내 내겠어.”

그래 맞다. 그 맛을 어떻게 흉내 낼까. 그 시절도 까마득한 옛날의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고 마누라 피난길 이야기에 같이 마음 아파 해주던 남편도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어. 피난길에 목말태워 주던 아버지, 재봉틀 끌고 오던 어머니 이제 다 그리운 이름들이야.

 

 

◆ 모영대 어르신 (1938년생)

밤마다 가위눌리며 견뎌내다.

처음으로 감정의 소요돌이를 겪은 나이였지. 열세 살, 청주 상당 산성 동네라 피난민이 모여들었어. 작은 시골 동네에서 사람구경을 제대로 못 하던 우리들은 낯선 사람들이 보따리 하나씩 챙겨서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이 신기했어. 조용한 산성 동네라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낯선 사람들이 마을로 계속 온다는 건이 우리들에게는 사건이었지. 어머니가 담아놓은 장을 피난민에게 나눠주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어. 전쟁 난리 통에는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울 때라 그게 이웃들한테 하는 보시였어. 우리도 투정 부리지 않았어.

한창 피난민들이 마을에 오더니 이번에는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이닥쳤어. 총을 멘 인민군들은 공포였지만 다행히 우리를 해코지 하지 않았어. 후퇴하면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산성 동네를 찾았던 거야. 동네에 대추나무가 많았는데 인민군들이 대추나무를 죄다 털어먹었어. 우수수 떨어지는 대추를 먹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옆에도 못 갔지. 총이라도 들이대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지만 끼니만 때우고 마을을 떠났어. 어떤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와서 잘 방만 내주면 사람들을 해치치 않겠다고 했지. 가슴이 조마조마 했지만 아버지는 방을 내어주었어. 총칼 든 인민군이랑 한 지붕아래서 며칠 밤을 보냈잖아. 새벽녘에 끽 옆 방문 여는 소리라도 나면 우리 방으로 쳐들어오면 어쩌나 밤 잠 설치는 게 예사였어. 어쩔 수 없었고 전쟁은 우리가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만들어. 그래서 비극이야.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총알 세례보다 인민군과 한 집에 기거하는 공포가 더 큰 두려움이었지. 그리고 인민군들이 퇴각하고 다시 마을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었어. 보도연맹 사건이라고 나중에 어른들한테 들었어. 눈에 선한 충격은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살을 시킨 현장이었어. 빨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총살했지.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우리 어린 아이들은 나무 뒤에서 숨어서 그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어. 자다가 가위 눌리는 건 예사였지. 식은땀을 뻘뻘 흘려서 옷이 다 젖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전쟁은 그렇게 아이들에게도 처참한 현장을 여과 없이 보여주잖아. 그래서 기막힌 비극이지.

 

 

◆ 양영석 어르신 (대전, 1935년생)

6·25, 책상을 등에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날선 긴장감으로 6·25를 맞이했어. 대전 공업학교 2학년 때였지. 대전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시내에 사이렌이 울리고 난리도 아니다. 전쟁이 났다고 들었어. 너희들 어떡하니?”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전쟁이 났다고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하셨어. 가슴이 두근두근 했지. 나는 공부하던 책상을 그냥 두고 올수가 없어서 책상을 대충 끈으로 묶고 등에 짊어졌어. 왜 그랬나 몰라,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그 책상을 두고 올 수가 없더라고. 정이 들었는지. 다시는 못 돌아갈 학교 같았는지. 그 무거운 걸 미련하게 짊어지고 더퍼리 옆 지실재를 넘어서 자양초등학교 날망동면 지나서 모래재를 넘었어. 그리고 다시 배치재를 넘어 그 판장리 나루터까지 무작정 걸어갔어. 맨몸으로 걸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책상을 짊어졌으니 어깨 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어. 그땐 고개가 왜 그리 많았는지. 나루터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 배를 타고 시골마을로 들어가는 거야. 전쟁이 났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두렵기도 하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지. 그 무거운 책상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6월의 그 여름을 무작정 걸었으니 순진한 건지 미련한건 지 말이야. 휴….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얘기 같지? 그게 우리들 살아 온 이야기야.

고향집에 가보니 아직은 실감을 못했는지 마을 사람들은 바삐 밭일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면장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처세를 잘한 덕분에 우리 마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어. 다른 마을들은 좌파를 학살시켜서 보복을 당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었어. 하지만 피난처 역할을 하느라 분주하기는 했지. 아버지가 한학자여서 서울에서 피난 온 양반들에게 집을 내줘야 할 때가 많았으니까. 오후 3시에서 4시만 되면 북적북적했지. 어떤 날은 사랑방도 가득 차서 잠자기도 마땅치 않았어. 우리 민족이 겪는 비극이라 우리 가족은 이웃들에게 방을 내주기도 했어. 나는 전쟁 기간 동안 한문 공부와 농사일을 하면서 지냈어. 조용한 산골 동네라 큰 사건 없이 무사히 지나고 산 벚꽃이 환하게 피던 날 아내를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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