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14:54 (목)
박승일 시평 | 이장욱 '소규모 인생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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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시평 | 이장욱 '소규모 인생 계획'
  • 박승일
  • 승인 2019.10.0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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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인생 계획 / 이장욱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 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간신히 팔짱을 낄 수 있는 여유. 소시민은 옹색하고 궁색하다. 식빵 가루를 찍어먹으며 연명하는 비둘기처럼 생명보험까지 해지하는 도시의 서민은 불안하고 암울하기만 한 것.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소중하게 각별하게 태어난 아기들. 그들이 청춘이 되었고 더구나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다 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 잘난 펭귄의 식량을 축내며 물범 식량으로 그득한 북극곰의 꿈을 생산한 까닭에 자신들의 인생이 간소해졌다고도 한다. 그랬더니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한다. 서글픈 역설이다.

이장욱. 서울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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