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완 시인의 그림책 산책] 『봄을 찾은 할아버지』 & 『이제 곧 이제 곧』

이해완 시인 승인 2021.03.12 14:28 의견 0

3월을 맞아 봄에 대한 그림책을 준비했습니다. 『봄을 찾은 할아버지』는 산속 외딴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봄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고, 『이제 곧 이제 곧』은 아직 봄을 모르는 어린 토끼 보보가 봄을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봄을 찾은 할아버지』

글 그림 : 한태희

출판사: 한림

오늘은 볕이 좋아 아내와 동학사를 찾았다.

주차장 앞에 길게 늘어선 가게에서 어묵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지만 어쩐지 허전한 듯해서 국화빵을 한 봉지 사서 하나씩 꺼내 먹으며 산길을 걸었다. 아직은 바람 끝이 찼지만, 이제 봄이라는 기분 탓인지 아니면 손끝에 전해지는 국화빵의 온기 탓인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박정자 삼거리에서 주차장 입구까지 긴 터널을 이룬 벚나무들이 겨울옷을 아직 벗지 않았는지 칙칙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다리 밑을 지나는 계곡물은 목소리가 제법 또렷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직 응달에는 얼음이 남아있는데, 그 얼음을 만지며 내려가는 물빛이 유난히 투명하다. 마음은 벌써 봄이 왔는데 먼 산꼭대기에는 잔설이 남아있다.

옛 선비들은 이렇게 봄이 가까이 오면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나서곤 했다. 매화음(梅花飮)을 즐기기 위해 음식과 지필묵을 챙긴 뒤, 나귀를 타고 동자를 뒤따르게 했다. 눈 속을 헤쳐 꽃향기를 찾는 것은 선비의 지조와 추위에도 고고한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가 닮았기 때문이다.

봄을 맞고 싶은 마음이 어찌 선비들만의 특권이겠는가. 방법은 조금 다를 뿐, 젊은이나 늙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위 고하를 넘어 그 마음은 다르지 않은 것을.

『봄을 찾은 할아버지』에는 산속 외딴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봄을 찾아 나선다. 산골의 경우는 겨울이 빨리 와서 끝나기는 더디니,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더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짚신을 삼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춥고 긴 겨울을 보냈다. 먹을 것이 넉넉해서 걱정은 없었지만, 늘 집 안에만 있으려니 참 지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무심코 “봄이 빨리 와서 환하게 핀 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에 봄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 막상 할아버지가 봄을 찾아오겠다고 나서자, “가만히 기다리면 어련히 올 텐데요.” 하고 만류하지만, 할아버지는 고집을 부려 길을 나선다.

이곳저곳 헤매던 할아버지는 냇물에도 가보고, 뒷산 봉우리에도 올라보고, 겨울잠 자는 곰을 찾아가고, 꿩에게도 가보고, 이무기에게도 가보지만 모두 봄이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쏟아지는 눈 때문에 지쳐 쓰러지고 마는데,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가 풍겨 눈을 떠보니 머리에 꽃송이를 꽂은 동자가 서있다. 동자의 손을 잡고 꽃향기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네 집 마당이다. 마당에는 매화나무 가지가지마다 붉은 매화꽃이 활짝 피어 향기로운 꽃 내음이 진동한다.

『봄을 찾은 할아버지』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한태희 작가는 화선지에 먹으로 눈 덮인 겨울 풍경을 정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눈 속에 붉게 핀 매화는 향기가 책 밖까지 퍼져 나와 독자를 취하게 할 정도이다. 매화향을 맡으며 어깨춤을 추는 노부부와 함께 즐거워하는 강아지의 모습이 정겹다.

동학사를 내려오며 벚나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는데 나뭇가지 끝에 환약처럼 둥글둥글한 꽃망울이 맺혀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꽃의 요정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얘들아, 서둘러. 벌써 봄이 왔단 말이야!’

모르긴 해도 저 속에서는 꽃의 요정들이 팝콘 같은 예쁜 꽃을 터뜨리기 위해 분주하게 기계를 돌리고 있을 터이다.

『이제 곧 이제 곧』

글 : 오카다 고

그림 : 오카다 치아키

옮김 : 김소연

출판사 : 천개의바람

숲은 조용히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숲속에는 토끼 가족이 살고 있다. 토끼 가족 중 막내 보보는 봄이 어떤지 아직 모른다.

오늘 아침도 도토리 수프를 먹었다. 또 도토리 수프냐고 투정하는 토끼 형제들에게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그러면 맛있는 걸 많이 만들어 줄게.” 엄마가 말한다.

보보가 기다리는 봄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창밖에 아이들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남자아이 둘이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날씨가 풀려서 나온 모양이다. 14층, 거실 유리문 앞에 보름이와 함께 쪼그려 앉아 내려다본다. 아이들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보름이의 눈동자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움직인다. 노안이 일찍 온 나에게는 네트 위로 하얀 공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보름이에게는 선명할 터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지난날 써둔 졸시 한 편이 불현듯 스쳐간다.

이해완

봄은 징검다리 건너서 온다

오는 길에 살얼음 조금은 묻혀 갖고 온다

그래서 손잡아 보면 어쩐지 찬 듯싶다

봄은 오는 길에 묵은 때를 씻고 온다

낮은 곳에 뜻을 둔 저 투명한 강물에

마음의 밑바닥까지 환하게 씻고 온다

그래서 그런 건가 봄바람을 맞고 있으면

내 몸이 미세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한 알의 작은 씨앗으로 다시 시작해도 될 것 같다

나무 위에 올라간 형들이 외친다. “와아, 바다가 보인다.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봄이 오는 건 어떤 거냐고, 이제 곧은 언제냐고 물어보지만 형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 뿐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둥 둥 울리는 소리를 듣고 보보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간다. 봄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보가 만난 것은 정말 봄일까? 놀랍게도 보보의 눈앞에는 거대한 곰이 서 있다. “아저씨가 봄이에요?” 봄을 모르는 천진무구한 보보의 물음이 미소를 짓게 한다.

이제 곧 따뜻해질 날씨를 피해 여행을 떠나는 곰의 도움으로 보보는 나무 위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다도 보고, 건너편 땅이 연한 초록으로 빛나고 있는 것도 보게 된다.

3월, 대지는 이제 곧 남루를 벗고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아날 것이다. 그러면 나도 보름이를 데리고 날마다 날마다 산책을 할 거다. 만나는 것마다 꼬리를 흔들며 코를 들이대고 킁킁대는 보름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 이해완 약력

- 시인

- 시집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에 선정되어 『내 잠시 머무는 지상』 태학사 발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품 창작지원 작품에 선정되어 『수묵담채』 고요아침 발간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 수록, 중앙일보 간

- 대전시민대 강사 역임

- 한국그림책연구소장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