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상고(현 우송고) 67년간 우뚝… 지역사회 이끈 인재 산실

70년 가까이 대전 인재들의 텃밭이 돼 온 대전상고(현 우송고) 동문회 발자취
대전상고 구호는 ‘선배존경 후배사랑’

정다은 기자 승인 2021.04.08 14:58 의견 0
대전상고 동문들


1954년 개교한 대전상고는 1960년에 동창회가 구성이 돼 31대까지 이어져왔다. 8대까지는 형식적인 동창회였고 9대 박충회 회장이 본격적으로 동창회 형식을 갖추고 활동을 했다. 70년 가까이 대전 인재들의 텃밭이 되어온 대전상고 동문회 발자취를 대전상고의 살아있는 역사, 자랑스런 청원인 제1호 전영만, 이성재 회장으로부터 들어봤다.

전영만 선생님


전영만 동문: 대전상고는 동창회보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청원(푸를 청 靑, 나라동산 원 苑)’의 이름을 따 청원회보라고 지어 발행했습니다. 박충회 1회 선배가 시작을 해서 10대 최정원, 11대, 12대는 국회의원을 지낸 박완규 연임 회장, 13대는 서울에 있는 이재선. 그리고 14대는 김정현, 15대는 강명희. 이원보, 이성재 회장님이 22, 23대, 21대는 김경수 선배님이 하셨는데 22대에 동창회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5기수를 띄워 8회에서 13회로 오면서 저 전영만이 회장을 이어받았는데, 동창회장은 하면서도 바로 받을 수가 없어서 선배님이 이어 하시던 일을 9월 8일 유성호텔에서 이어받으며 취임식을 했어요.또 하나 제가 일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청원 연합 체육대회였습니다. 1회 졸업생까지 2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데 그 체육대회가 참 잘 됐습니다. 보통 1,000명은 넘게 참여를 했고, 이성재 회장님 왔을 때는 1,300여 명 회원들이 모여 종목도 다양했어요. 이벤트도 재미있게 추진했습니다. 예를 들면 돼지를 4마리를 잡았어요. 제 아내가 돼지를 4마릴 잡아서 그걸 공짜로 나눠주면 질서가 없잖아요. 1,300여 명 왔는데 모자라고. 그래서 큰 쟁반에다가 조금씩 팔았더니 다들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 뒤에는 동문 축구부가 창단이 돼서 30년간 유지 되다가 몇 년 전에 해체가 됐어요. 제가 동창회 일을 볼 때는 축구부가 전성기였지요. 전국대회에 나가서 제일 큰 대통령배도 한 번 우승을 했고. KBS배는 20여 차례 우승을 했어요. 그래서 대전상고라고 하면 전국에서 ‘5대 상고’ 안에 드는 유명한 학교였지요.

지금은 상고가 다 없어졌어요. 상공업이 쇠퇴했으니까 인터넷고, 정보고 등으로 바뀌고 상고라는 이름은 없어졌어요. 그래서 저희 대전상고는 상고시절로는 전국에서 유명 상고다. 이렇게 소문이 났었고, 그 다음 축구로 유명했습니다. 우리 동창회에서도 축구부 후원회를 만들었어요. 축구 선수를 돕고 선수를 육성하며 기금을 만들고 지원을 하자. 그것을 저와 박충회 회장, 송재석 3회 회장, 5회 한가람 네 명이 만들어서 제가 일을 했습니다. 그 뒤에 1억 기금 조성 본부장을 맡아 지원을 하고, 맨 마지막 후원회장도 제가 했어요. 회보 만들고 축구부 돕고 체육대회 여는 일을 하며 장학금도 계속해서 지급을 했습니다.

전영만선생님(왼쪽)과 이성재 회장님(오른쪽)


대전상고 중흥기가 바로 이성재 회장님 때입니다. 갑자기 우리 대전상고동창회를 UP 시켰어요. 대전상고 동창회의 품격을 한꺼번에 반석위에 올려놓으신 분인데 이 분의 제일 큰 업적이 우리 명부를 제일 잘 만들었다는 것이에요. 회원명부와 청원산악회를 만들어 전국 유명

청원산악회


산 섭렵을 다 했는데 그 한 번 산행을 하려면 애로가 참 많습니다. 여러 명이 가니까 문제도 있고 요청도 안했는데 경찰이 와서 안내를 다 해주고 정리를 해주고 하루 종일 우리와 그렇게 생활을 하고. 관광버스 30대가 떠나려니 장소도 없잖아요. 그래서 남문주차장에서 만나요.

거기에다 출발 장소를 만들어 놓으면 초대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정치인이 20여 명은 와요. 아무 연락도 안 했는데 20여 명이 와서 감동을 하죠. 우리 회원들 격려를 해주고. 그렇게 해서 1월에는 시산제를 식장산에서 하고 12월에는 종산제를 계룡산에서 갖추어서 많이 활약을 했어요. 또 이 회장님게서 청원 골프회와 청원축구회를 만들고 졸업생 축구회를 만들어서 매년 시합을 하니까 총동창회에서 전부 관장을 하고 시상도 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 모든 일을 해내신 이성재 회장님이 대단한 분이고, 우리 동창회 역사상 제일 큰 업적을 남기셨다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즘은 아시다시피 코로나19 때문에 동창회 활동을 전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나도 어느덧 나이가 이렇게 먹어서 나도 모르게 80을 훌쩍 넘었네요.

이성재 회장


이성재 회장: 우리도 한참은 과도기가 있었어요. 대전상고에서 우송고로 넘어가면서, 두 번째 인문학교로 가면서 남녀공학이 된다고 해 동창회에서 절대 안 된다고 거부했던 적도 있습니다.

상업학교에서 인문계로 바뀌니까 처음에는 대전상고동창회에서 지금은 우송고동창회로 바뀌었지요.


15회 정신조회장이 회장을 할 때에 장학회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몇 억 기금을 조성을 해서 그 이자를 더해 장학위원들 부담을 해서 매년 몇 백만 원씩 지원을 하고 있고, 모교 벽에 장학금 후원 현황판을 만들어 놨어요.

6회 동창회가 4·19 때 일이었습니다. 매년 4월에 새 학년으로 올라가는데, 당시 3학년은 졸업하고 이원보 등 학생들은 아직은 2학년일 때였어요.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 등이 대전에서 데모를 치열하게 했어요. 자유당 독재가 너무 심하니까 그 독재에 대해서 ‘학원의 자유를 달라’ 그리고 ‘구속학생 석방하라’ 이런 시위를 하는데, 엄청난 시련을 당했어요. 한 학생을 경찰 한 명이 담당할 정도로 그렇게 시련을 겪던 때였습니다. 3월 10일 대전상고가 1, 2학년밖에 없으니까 1, 2학년 전체가 대동방면으로 해서 역전으로 진출하는 시위를 했어요.

그러다가 그 사실이 발각이 돼서 경찰이 제지를 해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학교 근방에 와서 다시 시위를 하는데 경찰이 얼마나 심하게 단속을 했는가 하면 구타는 보통 일이고, 사람 죽일 정도로 때렸습니다. 간부들은 전부 가두고, 나머지 주도적인 학생들은 전부 대항하다가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민가에 숨었어요. 그래서 민가에 들어가서, 방으로 들어갈 순 없으니까 화장실로 피하고. 그때 화장실은 널빤지로 놨던 화장실인데 11명이 들어가니까 푹 꺼져서 똥통에 빠지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지금은 작고하신 우리 김정우 이사장님이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초대 학교를 세우신 분이에요. 그 아드님이 있었단 말이에요. 김정우 교장선생님이 경찰서에 와서 사정도 하시고. 그래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시켜주시고. 그 학생들을 식당에 데려가서 밥도 사주시고 격려도 해주셨어요. 그게 4·19 전초전인 3·10 민주화 의거였어요. 대전고등학교는 벌써 의거비를 세웠는데 우리는 여의치 못해서 못하다가 작년에 드디어 교정에다 의거비를 세웠어요.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행사를 못하고 금년 3월 10일 기념식을 갖기로 했는데 또 못했네요.

지금은 알루코 박도봉 회장이 동창회장인데 목원대학교 총동창회도 역임을 했어요. 금년부터 회장이니까 코로나19만 아니라면 활발하게 동창회 활동을 할 텐데 앞으로 많이 활동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이성재 회장이 주관해 만든 청원명부


아까 장학재단 얘기 조금 하다가 딴 데로 샜는데, 장학재단을 만들 때, 축구부가 해산을 할 때 가지고 있던 후원회 돈을 서울에 1/3 주고, 나머지 2/3를 대전 동창회에서 받아 갖고 있다가 이번에 장학재단에 후원을 해 1년에 3000만 원씩 지급하고 있어요. 모교학생 15명, 동문자녀 15명에게 각각 1500만 원씩 전달하고 있어요. 초대 장학재단 이사장에 이어 지금 장학재단 이사장은 나 이성재가 맡고 있습니다.

축구부가 해산되니까 남은 기금을 어떻게 쓸 건지 의논 중에, 마침 동창회관이 생길 때니까 동창회가 필요하다 해서 저 이성재한테 동창회 발전 기금으로 5000만 원을 맡겨 놓은 거예요. 발전기금이라 한 푼도 안 쓰고 있다가 장학회 만들 때 그게 모태가 된 것이지요.

1/3은 서울 동창회관 보증금으로 쓰고 있어요. 동창회가 이렇게 발전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동창회관 만드는 건 주춧돌을 놓은 거죠. 김석태 선배가 동창회관을 완성 했어요.

대전상고 동문회관


내가 그만큼 할 수 있었던 건 사무총장이 뒤에서 방아질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을 맡아주고 회장님, 이런 것 있습니다.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며 정보를 주니까 한 거지요. 내가 사실 부회장을 오래 했어요. 박충회 선배 때부터 10몇 년을 부회장을 했으니까, 한 20년 정도 11대부터 21대까지 부회장을 했어요. 그래서 선배들 다 보면서 선배님들한테 배워서 하는 것이고 ‘내가 동창회장을 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곳들은 어떻게 하는지 벤치마킹도 하고 그 사람들이 안 했던 것들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산악회를 해서 동문들과 전국방방곡곡 산악도 하고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어요.

또 ‘청원인의 집’ 체계도 만들었어요. 청원인의 집이라는 명패를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청원인 들의 집에다, 가게에다, 식당에다 붙였는데 그럼 그걸 보고 대전상고 출신인 걸 아는 거죠. 동문이 3만 명이 넘으니까 우리끼리만 단합이 돼도 서로 상부상조해서 살아갈 수가 있거든요.

끝으로 대전상고 하면 구호가 ‘선배존경 후배사랑’이에요. 그래서 화합이 잘 되고 ‘청원인’이라는 게 늘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대전상고(현 우송고) 총동창회는 금번 시사저널 청풍 월간지를 통해 1차적으로 총동창회 역사의 산증인인 전영만 선생님과 이성재 총동창회 장학회 이사장을 모시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금은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총동창회의 숨결과 발길을 찾아 어떻게 대전상고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조명함으로써 더욱더 단합된 총동창회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선배들이 명문 대전상고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준비한 31대의 계획입니다.

다음 달에도 새롭게 과거의 아름다운 활동을 재조명하여 자랑스러운 선배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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