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檐牙), 그 유연한 곡선에게 묻다.

옥천 전통체험관 유숙기

정여림 작가 승인 2021.10.13 16:02 의견 0

정여림 ‘추억의 뜰’ 자서전작가, 시인

삶이라는 실타래는 길고도 풀기가 어렵다. 삶은 얽히고설켜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릴 때가 있다.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라고 프랑스의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아침저녁, 습관적으로 드나드는 아파트라는 네모 공간을 한번쯤 벗어나 보면 어떨까? 우리들, 모두는 내 인생, 내 삶을 바꾸어줄 그런 공간다운 공간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그곳에서 내 인생을 낯설게 한번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시인 정지용을 기념하는 옥천읍 향수길을 지나는 찰나, 측면으로 고요히 펼쳐진 한옥의 맵시가 내 눈길을 사로잡아 멈추게 했다. 새까만 기와지붕 아래, 완만히 늘어진 그 처마 선. 어머니의 치맛자락일까. 그것은 푸근하게 나를 붙잡고 위로의 말까지 걸어왔다. 내가 나고 자란 산야의 곡선, 느림과 여유라는 이름의 선이었다.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직선을 맞닥뜨리며 살아왔다. 도시는 너무나 많은 직선을 낳고 있었다. 그 선들은 가로, 세로로 곧게 뻗어있었고, 정확한 각을 만들며 절도 있게 달려가라 했다. 나는 한옥이 만드는 곡선의 푸근함 아래, 잠시 일상을 멈춰보기로 했다. 나지막하고 정감 있는 전통 고가구를 머리맡에 두고 방바닥에 정갈한 냄새를 풍기는 면 이부자리를 깔고 싶었다. 그리하여 낮은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보기로 했다. 한옥에 유숙하며 수없이 살아간 우리 옛사람들에게 삶의 ‘곡선 만들기’를 묻기로 했다.

여름이 숨어버린 가을 초입, 입은 반소매 아래 살결이 시리는 오후였다. 여행 가방을 올려멘 채 예약된 옥천 전통체험관 문을 들어섰다. 달라진 가을 하늘색은 검정 기와지붕 위에서 더욱 청명했고 하늘을 머리에 인 추녀는 서까래 레이스를 보이며 더욱 우아했다.

장엄한 기와지붕은 내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다가왔다. 정면에서 보면 그것은 침묵으로 위엄을 갖춘 근위병이었다. 몇 걸음을 빗겨 서서 사선으로 보면, 그것은 다른 지붕의 선들과 겹쳐지고, 먼 산과 어우러져 또 다른 아름다움과 자잘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선들을 멀리서도 바라보고 가까이에서도 바라보았다. 내 발걸음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은 나에게 다르게 말을 걸어왔다. 내 귀에 대고 살포시 속삭였다.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와 변화무쌍한 상황이 나열돼 있다고. 네 발길로 선택한 다양한 선들은 그것대로 얽히고설키어 또 다른 그림이 되어 너를 찾아줄 거라고.

치켜 오른 처마 아래 서까래는 즐비하게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자잘하고 반복적이기도 한 선들이 하루하루가 일 년을 만들고, 인생을 조립하는 것처럼 빼곡하기만 했다. 처마귀퉁이가 치켜 올라간 것은 빛의 입사각이 높은 여름에는 햇볕을 덜 받고 입사각이 낮은 겨울에는 빛을 보다 많이 받기 위한 우리 조상의 지혜라 한다.

기와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선 소나무 기둥은 가을바람과 소곤소곤 소통하고 있었고 너른 대청마루는 가을 햇살을 업어 재우고 있었다. 마당을 위용 있게 지키고 선 소나무는 구불구불 휘어 자란 제 삶의 이력을 보였다. 인생에 부침이 심했던 반증으로 가지 끝까지 굽어진 채로 용마루를 넘고 하늘 향해 뻗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하얀 창호지 바른 연갈색 창살문을 열어 그 안의 고요와 하나 되도록 짐을 풀었다. 밤이 되니 한옥만이 지어내는 고즈넉한 우아미와 고요미는 더욱 배가 됐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기와와 나무자재들은 더욱 온화하게 마음으로 다가와 편안함을 주었다. 뒤란에 선 나는 조선의 어느 대가 규수가 된 것처럼 초연히 하늘의 달과 별을 올려다보았다. 보름이 멀어 하늘은 유난히 검었는데 캄캄한 그 하늘에서도 빛을 발하는 별 하나가 있었다. 마당에 설치된 그네를 타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연인들의 이야기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저기 저, 유난히 반짝이는 별 보이죠, 아마 ‘개밥바라기’ 별인 것 같아요. 개가 저녁밥 주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서쪽 하늘에서 제일 밝게 뜬다고 하던데…….”

“아! 맞어, 금성이야. 저 별은 이름이 두 개지.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보이면 ‘샛별’로 불려, 새벽의 별이란 뜻이지. 옛사람들은 저 샛별을 보고 일터에 나갔데, 저녁엔 서쪽 하늘의 개밥바리기별을 보고 일터에서 돌아오고…….”

그런가보다. 시간과 공간이 바뀜에 따라 내 이름, 나라는 존재의 의미도 다르게 불릴 수 있을까…. 언제 이런, 자연에 동화된 대화를 고즈넉이 나눠 봤을까. 한옥 담장 바깥에 남겨두고 온 걱정과 일거리는 이미 건너온 속세의 군더더기가 되고 있었다.

창살문이 환히 밝아와 아침을 맞았다. 밤에 감상했던 한옥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며 ‘덜컹’ 문을 열고 나섰다. 나는 순간, 단내 나는 아침 공기에 반하고, 아침 햇살 받은 단아한 한옥의 맵시에 다시금 반하여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 내가 한국 사람이었구나!’ 한옥은 내 몸속 깊이 뿌리박힌 ‘편안함’이란 이름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 가을, 다가오는 추위에 대비할 인생의 우아한 곡선을 한옥에 머물며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흔치 않은 경험과 추억의 열매까지 이 가을은 맺어줄지니.

밤이면 한옥의 처마 끝을 내려 보며 무수히 많은 이들의 거동을 눈여겨보았던 달의 마음.

정지용 시인의 ‘달’로 한옥 유숙기의 말미를 수놓아 본다.

달 정지용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미욱한 잠과 베개를 벗어나
부르는 이 없이 불려 나가다.

한밤에 홀로 보는 나의 마당은
호수같이 둥긋이 차고 넘치노나.

쪼그리고 앉은 한옆에 흰 돌도
이마가 유달리 함초롬 고와라.

연연턴 녹음, 수묵색으로 짙은데
한창때 곤한 잠인 양 숨소리 설키도다.

비둘기는 무엇이 궁거워 구구 우느뇨,
오동나무 꽃이야 못 견디게 향그럽다.

정여림 작가

자서전 전문 ‘추억의 뜰’ 자서전 작가
시인
전 거제신문 기자
개인 자서전 外 마을(단체) 기록사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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