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바다 여행의 추억

장주영 교사 승인 2022.01.11 15:28 의견 0
바다 여행의 추억

한 해를 마감하며 기념으로 바다에 바람 쐬러 다녀오자는 선배님의 제안으로 대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함께 한 분들은 2020년 대학원 학당에서 인연이 된 분들이다. 사회에서 책임자나 대표로 계신 분들이라 그런지 배려가 남다르고 배울 점도 많았다.

역시나 오늘도 장거리 운전으로 우리를 편히 모시는 K 대표님은 유머와 입담으로 지루하지 않은 여행을 만들기 위해 애쓰신다. 그런데 수다에 빠지다 보니 새로 뚫린 빠른 길을 놓쳤다. 우린 구도로로 여유롭게 달리며 대천에 얽힌 오래된 추억을 듣는다.

대천 가는 중간쯤에 누워있는 칠갑산 자락 아래를 지나다 보면 허름한 가게가 있는데, 그곳에서 먹던 라면이 잊지 못할 맛이라며 K 대표님은 그때를 묘사한다. 라면을 끝내주게 맛있게 끓여 팔던 여인이 너무도 단아했다며 묘한 매력이 풍겨 지금도 이곳을 지나게 되면 생각난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L 이사님은 자신은 하얀 소복 입은 여인이 은근히 좋다며 재미를 거든다.

대천에 가족과 온 지도 삼십 년이 다 되어 간다고 오늘 여행에 의미를 붙이는 M 레스토랑 사장님도 추억을 떠올리며 무척 행복해하신다. 이야기와 함께 하는 여행길에 여유와 따뜻함이 흐른다.

바다 여행의 추억

청양과 대천을 지나는 창밖에 펼쳐지는 거리는 20년 전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심지어 지금은 폐점하여 찾아보기 힘든 크라운베이커리 간판도 눈에 띄어 신기하다. Y 회장님은 차에서도 사업 통화로 바쁘지만 바깥 풍경도 생중계하며 애써주신다. “이야! 대천역이다…!”

배려하는 사람들과 느린 풍경이 나의 뇌를 열어 준 것일까? 처음 보는 대천역 같았는데, 여름의 향기와 함께 낯선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25년 동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잊혀진 기억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먼지를 털고 기어 나온다. 마치 도서관 책꽂이에서 아무도 찾지 않아 대여되지 못하고 묻혀있던 책이 25년 만에 꺼내어지는 것처럼.

난 분명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온다. 내 눈앞에 1997년 뜨거운 여름, 대천역 앞에 서 있는 민소매를 입은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학년 선후배들끼리 학과 단합대회를 위해 여름 방학에 서해바다로 MT를 왔었다. 청주에서 환승 기차를 타고 장항선을 따라 대천역에 내렸다. 바다행 버스로 옮겨타기 전, 우리들이 1박 2일간 먹을 음식을 양 팔 무겁도록 푸짐한 장을 본 것이 생각 난다.

다 잊은 추억이지만 드문드문 사진처럼 남아있는 기억들. 썰물로 젖은 해변이 너무도 아름답고 길었던 바다, 맨발과 다리에 묻은 반짝이는 모래. 그리고 그것을 씻어내리던 대문 옆 수돗가, 방 앞에 걸터앉기 위해 놓여있는 낡고 좁은 마루, 바닷가 앞이라 방까지 드나들기 편했던 민박집, 뜨겁게 그을린 피부에 생감자 조각을 서로 올려주며 놀던 추억…….

그 때 십여 명이 갔었는데 기차를 타지 않고 유일하게 오토바이를 혼자 타고 온 복학 예정인 선배님이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나는 대천역 앞에서 기차를 타지 못했다. 그 선배님은 나와 함께 가고 싶어했다. 혼자 가는 게 심심하다며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여러 일행 앞에서 오토바이를 탄 선배님을 따라나서는데 부끄러웠다. 대천역 앞에서 친구들은 자기들이 짐을 다 들고 가겠다며 나의 팔을 가볍게 해주었고, 난 그 팔로 다섯 시간 동안 오토바이 뒤에서 그를 붙잡고 왔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하는 뜨거운 신기루 그리고 차들이 울려대던 시끄러운 경적 소리…….

차창 밖으로 대천역을 보며,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명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주인공은 따뜻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어릴 적 맡았던 향기와 함께 시간 속에 묻힌 기억이 마법처럼 되살아난다. 나 역시 우연한 자극에 의해 의식 저편에 꽁꽁 묻혀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가라앉은 과거의 기억을 순식간에 펼쳐놓은 멋진 여행. 인간의 기억이란,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주관적 해석에 의한 왜곡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과거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 되면 그 삶은 행복한 인생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생은 비의도적인 기억과 새로운 경험들이 뒤섞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워져 가면서 행복한 삶으로 완성되어 가는 게 아닐까?

만남과 이별이 있던 대천역을 새로운 인연들과 지나간다.

25년 전 기억의 소환으로 이번 여행은 더 두툼한 추억 뭉치가 되었다. 해변에 도착한 우리들은 미래에 추억이 될 사진을 찍고, 밀물에 지워질 모래 위에 글을 남긴다. 겨울 바다 여행은 조개구이의 짭조름함과 뜨거운 커피향과 함께 또 다른 기억을 남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츠와 마유미의 ‘연인이여 (恋人よ)’를 듣는다.

연인이여 안녕
계절은 돌고 돌아오지만
그날의 두 사람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는 사라지는 무정한 꿈이여

이 노래가 시보다 더 향기롭게 다가오는 겨울 바다 여행이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