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석 칼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노동과 태(胎) 자리

홍경석 편집위원ㄴ 승인 2022.06.07 15:07 의견 0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도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시인의 시 ‘긍정적인 밥’이다. 다수의 기관과 언론사 등에 글을 올리고 있다. 매달 기십만 원의 고료가 통장으로 들어온다. 따라서 함민복 시인보다는 많이 버는(?) 편이다.

작가가 돈을 가지고 따진다는 건 솔직히 지저분하다. 그렇지만 작가 또한 본질적으론 세속적 장삼이사에 불과하다. “소득이 없는 작가는 존재가치조차 없는 것”이라는 나름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셈법을 소유하고 있다.

그동안 발간한 4권의 저서 발행 목적 역시 베스트셀러를, 아울러 거기서 파생되는 인세(印稅)를 받을 요량으로 집필했다. 하지만 ‘책 안 보는 사회’의 육중한 벽을 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먹고 살 방편으로 지난 3월부터 공공근로를 시작했다.

처음엔 적응을 못해 무척 힘들었다. 삽질을 못해 꾸중을 듣기도 다반사였다. 잡초 따위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다가 중심을 못 잡아 같이 뒹굴기도 했다. 퇴근하면 전신이 아파 파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근육이완제는 밥처럼 매일 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3개월이 되자 비로소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공공근로 사업장은 양묘장(養苗場)이다. 눈도 뜨지 못한 새싹을 심어 가꾼 뒤 꽃으로 만들어내는 곳이다.

튤립을 시작으로 카네이션 등 많은 꽃을 재배하여 관내에 무상으로 보급했다.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그러므로 개화하여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고작 열흘에 불과하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는 우리네 인생길과 닮았다.

공공근로를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획득이다. 이는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사상’을 의미한다. 아침마다 양묘장으로 출근하노라면 먼저 새들이 반긴다.

참새와 까치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한껏 지저귀는 모습은 목가적 풍경까지 자랑하는 양묘장만의 특권이다. 밤새 성큼 자란 비닐하우스 안의 꽃과 묘목(苗木) 따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한 그러한 것들, 즉 노동이 나로서는 장차 또 집필할 새로운 저서의 소스(source)로 작용할 것이다. 문학적 ‘태(胎) 자리(場)’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모 전국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인생 9단’이라는 타이틀로 진행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고작 초졸 학력의 무지렁이가 4권의 저서를 발간할 수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를 밝혔다. 그 방송을 청취한 뒤 나를 보시려고 대전까지 찾아오신 열성 독자가 계셨다.

“어떻게 하면 책을 낼 수 있나요?” 나의 답은 명료했다. “저처럼 책을 만 권 읽으시면 됩니다.” 저자가 되려면 다독(多讀)이 답이다. 더불어 일체유심조의 긍정 마인드를 지녀야 옳다.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라는 인기 가요처럼 내 가슴에 남몰래 다가와 상처까지 심어 놓고 떠나간 그 사람과 대상까지 정말로 미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의 견지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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