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백의 복지이야기] 우리나라 노인복지

김동백 교수 승인 2023.04.07 14:27 의견 0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경로의식이 사회규범화되어 전래되어 왔는데, 노인을 문화전승자 및 인생의 완성자로 보는 자연발생적 태도와 민간신앙의 조상숭배 관념, 그리고 유교윤리의 효의 규범은 경로의 태도를 더욱 강화해 왔다.

경로사상이 투철한 사회에서는 노인을 위한 시설보호 같은 사회적 부양이라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와 같은 사업의 필요성도 없었다.

예로부터 이러한 경로사상에 입각한 가정 내에서의 노인 부양으로 인하여 노인복지사업이 활발할 수 없었지만, 경로 및 양로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노인복지사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예로 사궁보호(四窮保護)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후대까지도 계속되었는데, 사궁은 대체로 생계가 곤란한 환과고독(鰥寡孤獨: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가리킨다.

가장 최초의 기록은 28년(신라 유리왕 5) 11월의 일로 왕이 순행 중 얼어 죽을 지경에 처한 한 노인을 발견하고 “……이는 나의 죄이다.”라고 하며 옷을 벗어 덮어 주고 음식을 먹였으며, 관리에게 명하여 늙고 병들어 자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예는 파사왕·소지왕·선덕왕·성덕왕·경덕왕·흥덕왕 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118년(태조 66) 8월에 환·과·고·독과 늙고 자활할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여 입을 것을 준 일이 있었고, 고국천왕·고국원왕·보장왕 때에도 유사한 예가 있었다.

또한, 백제에는 38년(다루왕 11) 10월 왕이 동서부 지방을 순무하면서 가난하고 자활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곡식 2섬(石)씩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 같은 예는 비류왕·의자왕 때에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양로에 관계된 기록이 많은데, 첫째 국로에 관한 양로로, 이는 왕이 친히 구정(毬庭)에서 향연을 베푸는 것인데, 정종·문종·선종·숙종·예종·희종·고종·충렬왕 때에도 볼 수 있었던 일이다.

둘째, 60세 이상의 노인을 양휼, 즉 부양하는 것으로, 목종·현종·문종·선종·숙종·인종·의종·희종·고종·공민왕 때에도 있었다. 셋째, 왕이 남녀 80세 이상인 자를 모아 친히 주식(酒食)·포백(布帛)·다과를 주되 차등 있게 한 것으로, 현종·정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 때에도 있었다.

이 밖에도 태조 때는 8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자는 군역을 면하여 부모를 봉양하게 한 군역면제, 또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는 외관이나 외군에 보하지 않는 일도 있었고, 70세에 치사(致仕)함을 예로 하는 제도도 있었던 바 이들은 경로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군왕이 직접 경로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노인을 존경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여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숙종 이래 경로를 위하여 노년의 관민남녀에게 급여하는 노인직(老人職)을 두고 위계를 주어 영칭(永稱)하게 하고, 이미 계급이 있는 자는 무조건 한 계급을 특진시켰다. 그리고 ‘대명률’에 있는 규정을 적용한 것으로 사형 또는 도류형(徒流刑) 대상자에게 노부모 또는 조부모가 있어 달리 부양할 자가 없을 때에는 감형 또는 환형의 처분으로 봉양의무를 다하게 했다.

조선시대의 노인복지사업은 현대의 노인복지나 사회보장 및 연금제도 등과 비교해 보면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로사상이 투철하였던 당시의 노인복지사업은 노인우대의 임시 은사책으로 장로존경·여후면려(慮後勉勵)·자제지효(子弟之孝) 등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교육적인 면에 치중했다.

한편, 조선시대의 민생구휼사업 부서로는 구황청(뒤에 진흥청으로 바뀜)·혜민국·활인서·제생원·기로소·장례원 등이 있어 각기 독립된 기능을 가졌으며, 그 중 기로소는 70세 이상인 자를 대상으로 연회와 오락을 즐기게 하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1394년부터 1909년까지 존속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하여 노인복지사업이 행해졌다. 1910년 일본의 왕이 내놓은 이른바 임시 은사금(恩賜金)으로 양반유생의 기로, 효자·절부(節婦) 등 향당의 모범자, 환·과·고·독의 연민한 자를 구조하였고, 1916년에는 은사진휼자금궁민구조규정(恩賜賑恤資金窮民救助規定)에 의하여 60세 이상의 노쇠자에게 은사진휼자금을 급여하였다.

1929년에는 재단법인 창복회(昌福會)가 설립되어 귀족구제를 하였는데, 가계가 곤궁한 60세 이상자에게 지급액을 3할 증액하여 노동능력이 없는 노인귀족을 우대하였다. 이 사업은 인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화되고 있던 민족운동에 대한 무마책이자 통치연장의 도구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시설보호의 여명기로서 종교단체에 의한 양로사업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로사업의 효시는 조선시대 말 프랑스인 천주교 주교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조선교구장 블랑(Blanc. J.) 주교가 종로 똥골(東谷: 지금의 관철동)에 큰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의지할 곳 없는 남녀노인 40명을 모아 수용, 보호하였다. 이 양로원은 그 뒤 종현(鍾峴: 지금의 명동)으로 옮겼다가 1894년 이후 폐지되었다.

노인들에 대한 재가복지 서비스에는 건강지원 서비스로서의 노인주간 보호센터와 가정건강 보호와 가정의료 서비스가 있으며, 사회지원 서비스로 가정봉사원 파견 서비스, 전화확인 서비스, 이동배식 서비스, 우호방문 서비스, 단기보호 서비스가 있고, 접근지원 서비스로 교통편의 서비스와 정보제공과 의뢰, 법률 서비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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