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석의 단상]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입강선매(立講先賣) 단상

홍경석 편집위원 승인 2023.05.10 15:15 의견 0

입도선매(立稻先賣)는 모든 벼농사 농부의 바람이다.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팖’이기 때문이다.

모내기를 마치고 벼가 서고 나면 그때부터 몇 달이 지나야 비로소 벼가 익어 황금빛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불쑥 와서 벼가 막 서자마자 사겠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입도선매’의 직접적인 뜻은, 돈이 급한 농민이 벼가 익기도 전에 팔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뜻이 확대되어 물건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팔거나 졸업도 하지 않은 인재를 입사시키는 것 따위를 총칭(總稱)한다.

그러니까 아직은 사용할 수 없지만 미래를 보고 사고파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제 모 고퀄리티(高quality)의 학습단체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저처럼 무지렁이가 귀 단체처럼 대단한 곳에서, 더군다나 기라성 같은 분들만 오신다는데 어찌 감히…….” 하지만 그 단체의 회장님께선 이미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셨다.

“중학교도 진학 못 한 사람이 다섯 권의 책을 냈고, 다수의 기관과 언론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홍 작가는 이미 프로 강사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는 수 없어 승낙을 했는데 놀라운 일은 그 뒤로 다시 이어졌다. 곧바로 거액의 선(先) 강사료가 통장으로 입금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수박하게(수박하다: 붙잡아 묶다)의 처지가 되었다.

PPT

한마디로 입강선매(立講先賣)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제는 막역한 지인을 만나 강의에 필요한 PPT 자료를 새로이 만들었다. 기존에 있던 PPT를 크게 축약(縮約)하고 쇄신했다.

그러자 비로소 검덕귀신(얼굴, 옷 따위가 몹시 더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에서 목욕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인 양 개운하고 깔끔해 보였다. 지인과 밥과 술을 나눈 뒤 PPT를 배낭에 넣고 집으로 오는 택시에 올랐다.

그러면서 명강사의 조건을 생각했다. 혹자가 이르길 명강사는 지식을 팔지 않고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물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또한 명강사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그 또한 옳은 소리다. 끝으로 “명강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감동으로 영혼을 울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 역시 응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1시간 강의를 하자면 최소한 10시간 이상의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자신 있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막아놓았던, 만 권의 독서로 축적한 지식과 지혜의 물동(물이 흘러 내려가지 못하고 한곳에 괴어 있도록 막아 놓는 둑)만 시원스레 툭 트면 되기 때문이다. 새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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