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그 고통과 환희의 교차, 이택구 대전광역시 행정부시장

시사저널 청풍 승인 2023.06.08 11:38 | 최종 수정 2023.06.12 14:55 의견 0

행정고시 수석 합격자의 당연한 공식인 중앙부처 근무를 스스로 마다하고 지방 근무를 선택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대 젊은 나이에 대전 시청에서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해 행정부시장까지 쉽게 성공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 그의 인생 이면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간부가 일을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주위의 견제와 질시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로켓이 중력을 이기고 하늘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듯, 삶의 과정에서 비판과 견제의 무게는 당연히 이겨내야 할 중력과 같은 것이었다. 지방행정에 뜻을 두고 특유의 추진력과 창의력으로 지역의 크고 작은 사업에 주목할 만한 여러 성과를 일궈온 그는, 지금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평범하면서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 이택구’와 ‘행정가 이택구’의 모습이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 그가 선택한 수많은 ‘가지 않은 길’로의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 인간 이택구는?

1. 대입 시험 후 반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결혼, 제대 직후 아버지가 되다

대전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대입 학력고사를 보고 난 직후 친구의 주선으로 인근 여고와 반 미팅을 했다. 듣는이에게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겠지만, 그때 만난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따라 충남대를 선택했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무원이 되겠다고 행정학과에 들어갔다. 미팅에서 첫눈에 반한 그 여학생을 사랑했고, 그녀와 대학 생활 내내 붙어살았다.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본 행정고시 1차 시험에 보기 좋게 떨어져 입대를 결심했다. 내 조기 결혼의 복선이었는지? 신체검사에서 1급 판정을 받았으나 육군본부의 계룡 이전 때문에 대전에 있는 군수지원단에서 보충역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다는 핑계로 일병 계급장을 달았던 시기인 24살 때 그녀와 결혼했다. 그 시기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친가와 처가 양쪽 가족의 도움을 받았다. 제대 직후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나의 큰딸 ‘나래’다.

2. 아버지에게 각서까지 쓰고 시작한 나홀로 고시공부는 ‘시골 쥐의 기술’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충남도청에 오래 근무하셨고 금산 부군수를 마지막으로 퇴임하셨다. 나는 평생을 지방공무원으로 헌신하신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후에 행정고시를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무슨 공부냐고, 취직이나 하라고 말리셨다. 하지만 내가 꼭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달라며 의지를 보이자, 아버지께서는 A4 용지 한 장을 내미시며 각서를 쓰라고 하셨다. 딱 1년만, 그러니까 딱 한 번만 하겠다는 각서였다. 나는 그리하겠다고 각서를 써드렸고, 아버지는 그 각서를 지갑에 고이 접어 넣으셨다. 딸아이가 태어난 직후라 한 달 정도 아내의 산후조리를 돕고 난 후에 고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공부에 매진하는 강행군을 이어 나갔다. 그만큼 절박했고 치열하게 공부했다. 2차를 보고 난 후에 든 생각은 ‘이렇게 공부했는데 떨어진다면 다시 공부해도 안 된다.’라는 것이다.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운 좋게 행정고시 일반행정직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기대 못 했던 수석으로 최종 합격했다. ‘시골 쥐’의 기술이 처음으로 통했다는 자신감이 내 속에서 끌어 오르고 있었다.

3. 가지 않은 길의 시작… 연수를 마치고 대전시 공무원 지원

연수원에서는 SKY 출신이 아닌 지방대 출신인 내가 수석이라는 것과, 수석이면서 내무부를 지원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의아한 시선들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다. 연수를 마치고 근무 부처를 선택할 때 내무부에 소신 지원했는데, 그 당시는 지방자치가 곧 시작되는 시기여서 중앙의 영향이 적어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내무부의 인기가 떨어지는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방공무원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내무부가 지방행정을 총괄하니 나중에 수월하게 대전 지역으로 배치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방공무원은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해당 예산을 확보하며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만족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중앙공무원은 정책 수립과 예산 배분이 끝이지만, 지방에서는 섬세한 행정과정과 그 결과까지 직접 관여하여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도 국가재정을 투입해 사업을 해도 주민들은 현장 담당 공무원인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며 지방공무원으로서의 보람과 만족을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의 공무원이셨다. 지붕개량이나 퇴비 증산, 꽃길 조성 등 주민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사업에 열정적이셨기에 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셔서 집에서 얼굴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공무수행’이라고 새겨진 검정색 지프차를 타고 마을을 누비시던 아버지가 정말 멋지게 보였다.

4. 공직 선배 아버지의 당부 ’겸손‘

고시에 합격한 후 1년간 연수를 마치고 대전시에 사무관으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했다. 지방공무원으로 내려온 나는 처음에는 조직 내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중앙부처에 갈 수 있는데 왜 대전에 왔을까?”라는 궁금증과 앞으로 나와의 경쟁에 대한 불편함도 느껴졌다. 거의 삼촌뻘인 직원들과 근무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한편 그분들의 심적 부담이나 불편함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마다 공직을 시작하는 막내아들에게 아버지가 해 주신 당부가 늘 가슴에 있었다. 당신께서도 촉탁직(계약직)으로 공직을 시작하셨다며 항상 겸손하게 살 것을 당부하셨다. “나이 많은 부하직원을 볼 때 나를 떠올려 봐라. 그 사람들도 한 가정의 일원이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겸손하게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일하면 남들도 너의 진심을 알게 될 것이다.”

5. 아버지는 공무원으로서의 롤모델, 어머니는 삶의 길잡이

아버지는 나에게 공무원으로서의 롤모델이셨다. 아버지는 천안농고를 졸업하고 지금의 서울대 농대 격인 수원농대에 진학하셨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자퇴하셨다. 할아버지는 향교의 전교이셨으며 선비 같은 분이셨다. 할머니께서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며 살아가셨고, 집안이 어려워 살림살이까지 팔다 보니 마침내는 된장과 고추장까지 파셔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대학 3학년 때 할아버지 할머니 몰래 대학을 자퇴하고 천안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대학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한 서운함을 가슴에 안고 사셨던 것 같다.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곧잘 하던 나에게 기대가 크셨다. 물론 아버지는 무섭기도 했지만 늘 바쁘셔서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와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서적인 측면에선 어머니 영향이 매우 컸다. 어머니가 하시는 요리나 집안일을 도우면서 일머리도 배우고 가치관도 정립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하루는 콩나물을 사 오셔서 나보고 다듬어 달라고 하셨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좋다고 달려들어 놓고, 금방 싫증이 나서 다듬는 일을 그만두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떤 일이든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습관을 들여야지 중간에 그만두면 그런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습관이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도 일에 임할 때면 어머니의 이런 아주 평범하지만 또렷한 가르침이 머리에 생생하다. 어머니의 김치 담는 것을 옆에서 어깨너머로 지켜본 경험만 가지고 결혼 후에 직접 담가보니 맛 나는 김치가 된 것을 보고 스스로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런 영향으로 97년도에 펴낸 내 첫 책의 제목이 <인터넷, 어깨너머로 배워 전문가처럼 쓴다>였다.

■ 행정가 이택구는?

1. 일머리와 창의성, 업무 수행에서의 비판적 사고

나는 주변에서 “일머리가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낸다.” 또는 “생각이 특이하다. 창의적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사실, 업무에서는 누구보다도 집요하고 철저하게 접근하는 편이다. 나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먼저 “어떻게 만들까?”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일을 했을 경우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에 집중한다. 즉, 이 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입장을 먼저 들이대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을 먼저 고민한다. 내가 기자라면, 내가 시민단체라면, 의회라면 어떠한 비판을 제기할까? 모든 비판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사업을 추진한다. 물론 이 시간이 그리 길진 않다. 내가 구상한 일이기에 그 약점 또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 덕분에 나는 사업 추진 이후 애초 나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비판을 받는 일이 드물다. 도시행정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비판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판은 도전과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나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데 비판에 대한 답변과 대응을 중요시한다. 모든 일에는 분명 찬반이 존재하기에 당위성만 좇다 보면 분명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2. 석사에서 박사, 그리고 부시장까지… 계속되는 공부의 길

충남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5년 동안 서기관으로 근무한 후 국비유학생으로 영국 유학을 했다. 도시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영국 맨체스터 옆의 셰필드 대학에서 도시계획학 박사 과정에 도전했다. 당시에는 도시의 건축과 토목에 중점을 둔 학문적인 경향이 강해 이러한 도시계획 과정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2년 동안 국비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고, 나머지 1년은 휴직하여 전적으로 공부에 몰두해서 끝내 박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준비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10년을 일했다면, 유학으로 배운 지식으로 이후 10년 동안 새로운 도약을 이루었다. 그렇게 공부한 지식을 적용하는 동안 2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대전시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현재는 부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부는 끊임없이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의 반감기’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인데,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지식의 반감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한 번 습득한 지식을 평생 활용할 수 있었다면, 기술이 몇 달 단위로 발전하고 변화되는 지금은 지식도 초고속으로 변화하고 변동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으로서 시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지식을 새롭게 충전하며 살아야 한다. 최근에는 박사 전공을 살려 ‘도시마케팅’을 주제로 책을 저술하고 있다. 제목은 <잘 팔리는 도시>. 시민의 관점에서 살기 좋은 도시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에 더불어 방문자의 관점에서 잘 팔리는 도시라는 기준 또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너무 바빠서 아직 원고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지만, 틈틈이 관련 자료도 수집하고 이 제목으로 강연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3. 도전과 성취: 대전시의 숙원사업 추진과 성공 이야기

사무관 시절, 국제협력 업무를 맡으면서 기존의 국제교류가 주로 자매결연 방식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기술도시라는 대전의 특성을 살려 ‘세계과학도시연합(WTA)’이라는 국제기구 결성을 주도하여 지방자치단체도 다자간 국제교류의 첫 물꼬를 틀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 기구는 지난 20년간을 이어왔는데 아쉽게도 내가 대전시청을 잠시 떠나있던 2019년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너무 애석한 일이었지만, 현재 새로운 결성을 준비 중이다.

서기관이 되어서는 직원들에게 지난 십수 년간 우리 시가 실현하지 못한 사업들의 목록을 뽑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대전시 숙원사업 리스트를 작성하고 지금까지 하나씩 추진하여, 그 리스트의 거의 모든 사업을 해결할 수 있었다. 기업지원과장으로 4년 동안 재직할 때 리스트의 가장 위에 자리했던 이른바 과학산업단지 조성사업을 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 이유는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공약으로 포함 시켰음에도 조성이 안 되었고, 대기업인 현대가 대행개발을 약속할 정도의 호기도 있었지만 실패했다. 결국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되지 않아 사업이 중단되어 오랫동안 정체된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관행적 사고를 버리기로 했다. 국가사업이 아닌 ‘민관 합동개발’ 방식으로 선회해 진행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대기업인 한화그룹과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KDB)을 참여시켜 ‘대덕테크노밸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음 목표는 대전컨벤션센터 건립이라는 숙원사업이었다. 당시 컨벤션센터 건립의 주무 부처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담당했는데, 우리 시의 수년간의 설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부족하다며 설립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던 상황이었다. 나는 발상을 완전히 전환하여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닌 과학기술부를 찾아갔다. 대전은 대덕연구단지가 위치한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중심인데, 860만 평에 이르는 연구단지 안에 변변한 컨벤션센터 하나가 없어서 많은 출연연구소들이 타 지역으로 가서 회의나 전시회를 열곤 한다. 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인가, 과기부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과학기술부는 컨벤션센터를 설립할 수 있는 부지가 우리 시에 있냐고 되물어 왔다. 이후 부지 선정을 고민하다가 엑스포장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LH와의 협상을 통해 부지를 기부채납 받아 과기부 국비지원을 받아 비로소 대전시의 숙원사업이었던 대전컨벤션센터 건립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이렇게 난관을 돌파하거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일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얻는다.

■ ‘마음챙김’과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이택구

1. 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최고의 ‘마음챙김’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많은 고통에 맞닥뜨린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이 온다고 한다. 나는 영국에서 성공회 교회도 다녀보았고, 호기심에 불교 공부도 해보았다. 지금까지 ‘삶의 고통’에 대한 나의 정의는 “삶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떠한 일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가?”라는 극히 주관적인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내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을 한다. 복잡한 생각에 갇혀 있는 내 마음의 고통을 명상을 통해 바라보는 연습을 오랜 기간 해왔다. 명상의 시간에 감정과 느낌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 과정을 나는 ‘마음챙김’이라고 부른다. 나는 바쁘더라도 ‘마음챙김’을 위해서 차 한 잔의 시간을 갖고 사색을 즐긴다. 어제도 잠이 오지 않아 밤 11시에 혼자 보이차를 마시며 40분 정도 명상을 했다. 차를 마시면 정신이 더욱 맑아지고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는 데 도움을 준다. 생각은 그 폭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다수의 경우는 그 깊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생각은 잡념이고 망상인 경우지만, 깊이 들어가는 사유의 힘은 우리를 지혜의 길로 안내하곤 한다.

2.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시간… 그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우연히 읽게 되었고, 그 시에 매료되어 내 삶을 반추했다. 인간은 한번 선택한 길을 바꾸지 않는 습성이 있다. 바로 ‘경로 의존성’이라고 부른다. 내는 지금껏 어떤 길을 선택해 왔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프로스트의 시가 내 마음에 닿은 것은 “익숙한 경로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이가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내 핏속에 내재 되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로 인해 여러 번의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후회는 없다. 되돌아보면 공직에서 일하면서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던 만큼, 극적인 상황들도 많이 경험했다. 한때 경찰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대기발령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아가려는 로켓이 중력에 맞서야 하는 것처럼, 이런저런 모함과 시기 질투 등 온갖 어려움도 극복해야 했다. 우리 삶은 이런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추락할 수 밖에 없다. 내게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되뇌곤 했던 세 개의 문장이 있다. “못 견디면 지는 거고, 흥분하면 지는 거고, 귀찮으면 지는 거다.” 우리의 삶은 늘 의사결정의 연속이며 의사결정은 결국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은 선택을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선택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을 쉽게 하려면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대신 자신이 선택한 길 외의 수많은 길은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회비용이다. 나는 선택의 메커니즘이 단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선택했다면 선택하지 않은 것을 돌아보지 말고, 내가 결정한 것에 집중하라. 다만, 그 선택은 매우 치밀했어야 하며 최선을 다한 결과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 민선 8기, 이장우 시장을 보좌하는 이택구

1. 2023년 정부합동평가에서 정성평가 1위, 정량평가 3위로 대전이 역대 최대의 성적을 거두며 우수 지자체로 선정되었다

민선 8기 들어 대전시정을 추진하는 분위기와 스타일에 큰 변화가 생겼다. 사실 지난 민선 1기부터 현재 민선 8기까지의 시정을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고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민선 8기 들어서 가장 체감되는 변화는 우선 시정 분위기 자체가 매우 힘차고 역동적이란 것이다. 이는 이장우 시장님의 평소 소신, 즉, “일단 결정한 것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원칙과 그 궤를 같이한다. 국책사업의 선정이나 국비 확보 등에 있어서 시장의 정치력과 공무원들의 행정력이 결합하며 큰 성과들이 나타나자, 직원들의 자신감과 활력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쇠도 달궈졌을 때 두드려야 하고, 배도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듯이, 어떤 일이든 성취를 위해서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2. 대전시 올해에 160만 평 국가산단 지정으로 산업용지 공급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이장우 시장의 핵심공약이 산업단지 500만 평 이상 조성이다. 공약 이행의 시작으로 올해에는 정부로부터 160만 평의 국가산업단지를 지정받아 앞으로 나노 반도체 등 전략산업을 집적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동안 많은 지역의 기업인들은 사업을 열심히 하여 기업 규모를 키워도 그 크기에 걸맞은 기업 입지를 찾지 못해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대전에서 산업용지 부족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동안 대덕테크노밸리 130만 평 조성, 죽동 신성 방현지역 첨단 산단 개발 등 나름 산업용지 공급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조성이 완료된 즉시 완전 분양이 이루어져 여전히 기업들의 입주 공간 부족이 지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이번 국가산단 지정을 위한 심사에 직접 참석하게 되었는데, 일부 심사위원들은 대전의 국가산단 지정신청 면적이 너무 크지 않느냐, 그만한 수요가 있겠느냐 등의 회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이런 질문에 확신을 갖고 답변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대전에 신규 산업단지 조성은 모두 내 손을 거쳤는데, 조성만 하면 분양은 늘 ‘완판’이었으니 수요부족 문제나 규모 문제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기업유치 활동을 위해서는 일부 어느 정도의 미분양 용지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대전은 늘 조성 완료 즉시 100% 분양이 완료되었던 점을 강조했다. 많은 지역 기업인이 참석하는 대전경제포럼에 나가보면, 기업인들은 대전의 고질적인 산업용지 부족 문제가 이번 대규모 국가산단 지정으로 해결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시차가 있겠지만, 계속해서 산업용지가 조성될 것이다. 시에서는 기업유치를 위해서 산업단지에 약간의 미분양도 있어야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70% 정도가 분양되고 남은 30%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기업을 유치할 수 있다.

3. 대통령 공약으로 추진 중인 ‘호국보훈파크 조성’은 이제껏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다

2018년 말 정들었던 대전시청을 떠나 세종청사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는데, 둔산동에서 세종까지 운전 시간이 너무 멀어서 고통스러웠다. 세종이랑 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유성구 덕명동 대전현충원 인근에 전세를 얻었다. 집 가까이 있는 현충원 둘레길을 자주 산책하면서 대전현충원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좀 알아보니 놀랍게도 대전의 공공시설 중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시설은 오월드가 아닌 바로 현충원이었다. 현충원은 연간 누적 방문객이 약 350만 명으로 단연 1위이며, 의외로 중부권 최대 테마파크로 알려진 ‘오월드’는 코로나 이전 기준으로 약 130만 명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자원(?)’을 잘만 활용하면 대전을 “잘 팔리는 도시(나의 박사논문)”로 만드는 큰 기여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칭 ‘호국보훈파크’ 사업을 간단히 요약하여 대전 시청 후배들에게 전달하며 대선 공약으로 각 당 후보에게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이 사업은 윤석열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확정되었다. 대통령 공약의 실행을 이끈 민선 8기 이장우 시장의 정치력은 행정부시장으로서 이 사업을 다시 구체화하는 기회가 됐다. 우선 대전 현충원 참배객들의 방문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아쉽게도 참배객 대부분이 유성IC로 입장하여 참배 후 빠르게 유성IC로 우리 시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분들이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형 숙박시설의 부족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현재 이 사업은 유성구 구암동 현충원역 일원 약 70만 5,000㎡ 부지에 약 9,600억 원 규모로 조성될 예정이다. 이 사업의 핵심은 전국의 호국 보훈 가족들이 현충원 참배와 함께 편히 즐기며 쉴 수 있는 보훈 복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대형 보훈매장과 영외 PX, 보훈병원 건강검진센터, 제대군인 지원센터 등이 들어가는 ‘보훈 커뮤니티센터’가 국비와 시비로 건립되고, 보훈공원과 광장 등도 조성될 예정이다. 가족형 숙박시설인 콘도미니엄은 유성 온천과 연계된 ‘스파 힐링 워터파크’를 갖출 예정이다. 이제 이를 통해 참배객들이 현충원 방문 후에 최소 1박 이상의 체류형 관광객으로 대전을 좀 더 오래, 그리고 폭넓게 즐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호국보훈파크에는 가칭 ‘베테랑스 빌리지’라는 특별한 개념의 주거단지도 계획되고 있다. 베테랑스 빌리지는 현충원 인근에서 살고 싶은 보훈 가족과 퇴역 군인, 국가유공자 그리고 은퇴한 대덕특구 과학기술자 등이 거주할 수 있는 복합시설로 계획하고 있다. ‘베테랑‘이라는 말이 퇴역 군인이라는 의미와 함께 어떤 분야의 전문가 그룹도 포함한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이 사업은 국비와 시비 투입이 예정되어 있는 보훈커뮤니티센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민자사업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조만간 민자 공모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번에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이 확정되어 본 사업의 의미와 기대가 더욱 크고 그 실현 가능성에 국민적 관심이 모이고 있다. 여러 일들 속에서 1년을 정신없이 보내며 생각한 것은 이장우 시장과 우연이지만 소중한 인연은 나에게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환희를 느끼게 해줄 것 같은 기대가 있기에 오늘도 즐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재촉했다.

이택구 프로필

1992. 제36회 행정고시 일반행정 수석합격

2001. 3. 대전광역시 기업지원과장

2008. 1. 대전광역시 경제과학국장

2013. 1. 대전광역시 환경녹지국장

2015. 3. 대전광역시 기획조정실장

2021. 5. 국토교통부 혁신도시추진단 지원국장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기록정책부장

2021. 12. 제18대 대전광역시 행정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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