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의 가곡 교실’이 있어 행복한 토요일

일주일을 견디게 하는 에너지원이자 행복 바이러스

정여림 작가 승인 2023.06.12 15:21 의견 0

바리톤 이상철
통영시 ‘이상철 가곡 교실’ 강사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와…♩♪”

“도미솔미 도파라파….” 발성연습에 이어 오늘의 연습곡으로 우리 가곡 ‘보리밭’을 합창했다. 5월, 청보리가 푸르른 이 계절에 맞춰 선곡된 곡이다. 다사다난하고 치열했던 인생 전선에서 이제는 조금 비켜나, 서리 맞은 머리카락으로 가곡 교실에 앉은 이들. ‘가곡을 부르면 소년, 소녀로 돌아간 듯 젊어진다.’했는데 그들의 합창 또한 사뭇 푸르고 싱그러웠다.

우아한 소프라노 알토의 합창과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의 ‘이상철 가곡 교실’

이 강사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수강생들과 눈빛을 맞추며 발성 주문을 하다가도, 시기적절한 유머를 구사해 수업은 활기가 넘쳤다.

“목에서 얕게 나오는 소리가 아닌, 가슴과 뱃속 깊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옛날에 시골 학생들이 왜 일찍 결혼했을까요? 하굣길에 보리밭에서 그만 역사가 이루어져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있지요.”

이 강사의 위트와 유머로 교실은 웃음소리가 수시로 터져 나온다. 8여 년 전, 경남 통영시 한 단체를 중심으로 ‘가곡 부르기’ 모임이 태동했는데, 이후 이상철 바리톤이 주도적이고 연속된 재능기부로 이 모임을 이어왔고 지난해 3월부터는 통영시 ‘리스타트 플랫폼’ 3층에 안정된 둥지를 틀 수 있었다. 이 교실은 성황리에 진행돼 와 지금은 수강생이 50여 명에 육박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강사는 퇴직 7년 차 된 중등학교 음악 교사 출신이며 바리톤 성악가이기도 하다. 수업의 피아노 반주자는 현직 음악 교사이기도 한 그의 아내 김현숙 피아니스트다. 수강생들은 가곡을 부르는 틈틈이 강사, 피아니스트 부부의 익살스런 케미를 지켜보는 재미도 양념이라 했다.

“악보를 더 복사했어야 하는데 (피아노 앞 아내를 바라보며) 이 분이 게을러서 못 했다.”는 이 강사의 장난스런 멘트에 피아노 앞의 소탈한 아내는 노골적으로 그에게 눈을 흘긴다. 수강생들은 이런 그들의 솔직하고 자연스런 진행에 폭소를 터트린다.

우리 가곡의 가사는 모두 아름다운 시… 수강생들 가곡 부르며 행복 바이러스 얻어 “가슴 속 울화가 확 뚫린다, 일주일 견디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가곡의 가사는 모두 아름다운 시다. 수강생들은 성숙한 연배가 돼 곡의 가사를 다시 음미하니 곡이 새롭게 다가온다고 한다. 소년기에 지나쳤던 깊이 있고 아름다운 가사를 곱씹으며 향수에 젖는다.” 이 강사가 수강생들의 반응을 소개했고, 수강생들은 가곡을 부르며 달라진 자신들의 삶을 돌아봤다.

‘뱃속 깊이에서 소리를 끌어내는 연습을 하다 보니 소화도 잘되고 마음이 힐링된다. 행복 바이러스가 생겨 삶에 활력이 생기고, 막혀있던 울화가 확 뚫리는 것 같다. 퇴직한 남편과 냠냠하게 둘이 집에 있어 답답한데, 토요일 가곡 교실에 와 어울려 웃으니 살맛이 난다. 딸 내 집에 갔다가도 가곡 교실 결석 안 하려고 전날 왔다. 일주일을 견디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가곡을 부르다 보면, 응어리진 가슴속 애(哀)가 뱉어진다.’

수업 틈틈이 아내의 반주에 맞춰 들려주는 바리톤 이 강사의 멋진 시범 독창은 이 수업의 또 다른 백미. 교실을 꽉 채우는 굵직하고도 풍부한 그의 노래를 들으며 수강생들의 귀는 호사를 누린다. ‘클래식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품격을 더해준다.’고 강조하는 이 강사는 가곡 교실에 올 때는 예쁜 옷 입고, 멋지게 꾸미고 나오라며 수강생들이 토요일을 스스로 특별하게 만들고 즐기길 주문한다.

사실 평일 저녁에 이루어지던 가곡수업이었지만, ‘토요일 갈 데 없으면 우울해진다.’는 수강생들의 고백에 토요일 오전에 열게 됐고, 자연히 이 강사 부부의 토요일 개인 일정은 그만큼 제약이 생겼는데 부부는 기꺼이 감수한다.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나오고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이 교실. 지금껏 현수막을 붙여 홍보하는 일 한번 없이 조용히 이어왔지만, 그 명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수강생이 계속 늘어 이 강사는 곧 더 넓은 강의실로 옮겨가야 하나 고민 중이다.

퇴임 전, 가진 재능 나누려 결심… “나도 놀랐다 수강생들이 너무 좋아해, 교실의 주인공은 수강생들” 수업준비 1시간 전에 와서 리허설

“퇴임 전에 결심한 바가 있었다. 재능을 사장하는 것은 후회하는 삶이 될 것이다. 이를 사회에 환원하고 시민들에게 가곡향유의 기쁨을 전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노래 부르기를 너무도 좋아하니 즐기면서 이어왔는데 나도 놀라울 정도로 수강생들이 수업을 좋아해줬다. 교실의 주인공은 항상 여러분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노력한다.”

38년의 베테랑 교사였지만 그는 아직도 가곡수업 전날까지 리허설을 멈추지 않는다. ROTC 17기 출신으로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일까. 그는 그날 수업할 가곡에 대한 자료조사를 철저히 거치고 수업 한 시간 전에 강의장에 도착해 곡을 연습하고 피아노 반주도 맞춘다. 다양한 인문학 강좌도 자주 찾는데 더 좋은 교수법을 모델링하고 벤치마킹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에는 자체 발표회를 가졌다. 이 강사의 주선으로 오카리나, 하모니카, 기타연주자 등도 함께해 훌륭한 연말 파티가 됐고 수강생들의 만족도도 컸다. 올 연말 발표회는 통영 시민문화회관 소극장을 대관해 공연할 예정이다.

나는 연, 아내는 뒤에서 연출해 주는 얼레… 서로 발전해 가는 공연의 앙상블

그는 교사 시절도 그렇고 지금도 ‘옷 잘 입고 매너 좋은 멋쟁이 선생님’으로 통한다.

“다 아내의 내조 덕분이다. 처음 성악을 할 수 있게 아내가 옆에서 반주를 해주다, 서로 사랑이 싹텄고 결혼에 이르렀다. 아내를 안 만났으면 나는 성악에서 멀어져 이 나이에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음악 이론에서는 아내가 나보다 훨씬 낫다. 어떨 땐 관련 대화를 나누다 자존심 상할 만큼 내가 기가 죽는다. 하하.”

이 강사 부부는 음악적 공감대로 화제가 풍부하고, 공연의 앙상블로서 조언하며 서로 함께 발전해 간다. 부부의 교실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수강생이 전해준 말을 이 강사가 전했다.

“그분 말씀이, 제가 하늘의 연처럼 수강생들의 주목을 받으며 훨훨 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내가 뒤에서 얼레를 잡고 저를 풀었다, 감았다 모두 연출하고 있다며 저희 부부를 연(鳶)과 얼레로 비유해 주셨다. 원숙한 수강생들 눈에는 저희 부부의 이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양이다. 하하.”

마침 스승의 날이라 수업 후 조촐한 회식이 있었던 자리. 그는 힘찬 목소리로 가곡 한 소절을 좌중에게 들려줬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자리를 파하게 되자 수강생들을 찾아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정담을 나눈 그가 말했다.

“가곡 교실을 이어가며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한 건 처음이다 싶다. 재능기부인데 오히려 제가 수강생으로부터 받는 것이 훨씬 많다. 지금 만큼만 아름다운 날들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죽는 날까지 다 같이 음악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

최근, 조금은 잊혀져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곡을 되살리며, 지역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 강사. 그의 행보만큼 지역 가곡 애호가들이 가질 위안과 기쁨도 커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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