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림의 인생 Rebooting] ‘통영민국’에서는 내가 최고 스타 수준 높은 색소폰 연주와 퍼포먼스, 입담까지 갖춘 아티스트 이순택 색소포니스트

웃음노래교실 강사

정여림 작가 승인 2023.07.11 15:43 | 최종 수정 2023.07.12 13:23 의견 0

인생의 시련기에 색소폰과 운명처럼 조우, 타고난 음악성과 열정으로 독학해 감동의 색소폰 무대 만들어…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다.”

20대에는 기질에 맞지 않는 일자리를 전전하다 우연히 기타를 잡았고, 그룹사운드 보컬로 활동하며 음악인의 길에 들어섰다. 40대에 다가온 인생의 시련기에는 색소폰이라는 악기와 운명처럼 조우해 몰입하며 극복했다.

60대가 된 지금은 노래하고 연주하는 아티스트로, 시민들에게 단비 같은 웃음을 주는 노래 교실 스타강사로 자리 잡았다. 그는 자신의 호흡으로 희노애락의 감정을 불어넣어 뱉을 수 있는 색소폰이 한없이 좋았다. 그가 혼신의 정열을 받혀 불어내는 애절하기도 하고, 때론 흥겹기도 한 연주를 듣자면, 그가 살아온 인생길도 파란만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소박한 꿈은 이미 다 이뤘다’며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먼 여행길을 돌아온 자처럼 안정된 미소를 보였다.

통영이 낳은, 통영의 자랑 이순택 색소포니스트

“우와~! 우와~!”

지난달 10일 저녁, 경남도민체육대회를 개최하는 경남 통영시의 강구안 문화마당에는 ‘레드카펫 위의 선율’이라는 이름으로 음악회가 열렸다. 항구의 아름다운 밤바다 전망에 야광 네온사인도 황홀한데,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흥겹고 멋들어진 색소폰 연주는 늦은 시간까지 관객들의 발을 묶었다. 무대를 장악하는 이순택 색소포니스트의 연주와 퍼포먼스 노래까지 다양한 래퍼토리에 시민과 관광객들은 모여들어 환호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경남 통영이 고향이다. 아버지가 직업을 찾아 부산으로 이주해 그도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이후 20대 초, 그와는 안 어울리는 여러 기술 관련 직장을 20여 곳이나 전전했다.

“적성에도 맞지 않았지만, 야행성이라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도 많이 힘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밤잠이 없었다. 방황하다 직장 바꾸기를 수십 번… 어느 날 기타교습을 받게 됐는데 남 들 1년, 2년 걸려 배우는 것을 저는 서너 달이면 거뜬히 배웠다. 그 이후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23세부터 상업적 기타를 쳐 야간 업소에서 연주하다 그룹사운드를 결성해 보컬로도 활동했다. 그의 인생길에도 격랑은 있어 40대 중반 개인적으로 힘겨운 시련을 겪게 됐다. 우울증, 대인 기피증까지 생겨나 근무 외에는 두문불출하며 세월을 보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무렵 운명이 되려는지 친구 집에서 안 쓰고 둔 악기 가방을 하나 발견했다. “이거 안 쓰면 내가 좀 써도 될까?” 그것이 색소폰과의 첫 인연이었다.

인생의 시련기에 운명처럼 손에 쥔 색소폰, 교본으로 독학, “물 흐르듯 저절로 스며들며 배워지더라.”

그는 책방에서 색소폰 교본을 샀고 독학을 시작했다.

“다른 것들은 배워봐도 그다지 재능을 보이지 않았는데, 악기는 뭐든지 쉽게 다가왔고 잡으면 따로 배우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터득이 빨랐다. 특히 색소폰은 내 오만가지 감정을 호흡으로 불어 넣어 발산할 수 있어 더욱 매료됐다. 슬프면 슬픈 대로 고독하면 고독한 대로 색소폰에 호흡으로 불어넣었다. 색소폰은 우는 소리, 악을 쓰는 소리, 애를 태우는 소리, 감미로운 소리 등 다양한 감정을 기교로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는 멋진 악기다.”

밤 근무를 마치면 색소폰을 들고 깜깜한 통영 밤 바닷가를 찾았고, 연애하듯 색소폰을 알아갔다. 날이 추워지면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냈다.

“슬슬 하면 물 흐르듯 저절로 스며들었고 왠지 잘 돼 지도 선생 없이 교본만 보고 혼자 배웠다. 좋은 연주를 들어보고 나도 그 기교를 따라 해 보면 그냥 저절로 되더라. 집안에 음악 하는 사람은 없어도 아버지께서 노래를 참 구성지게 잘하셨고, 박자감도 좋으셨는데 받은 재능이 있는 듯하다.”

타고난 입담과 노래 실력까지 갖춰 ‘통영의 나훈아’로 불려… 인기 웃음노래강사로서는 시민들에게 웃음과 즐거움 선사

그는 어찌 보면 마이크를 잡기에는 제격으로 여러모로 갖춘 사람이다. ‘통영의 나훈아’라고 일컬을 만큼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악기 연주 실력에 타고난 재치와 입담까지 가졌다. 학교 때는 오락부장을 도맡아 했고 술자리에 앉으면 친구들은 그의 입만 쳐다보며 웃을 준비부터 한다.

부산에서 방위병 근무 시절에는 장기자랑으로 원맨쇼도 하고 백남봉, 남보원 성대모사도 했는데, 친구들이 배를 잡고 뒤집어져 문화선전대 MC로 선발됐다. 덕분에 편안한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을 뿐, 평생 음악인으로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타리스트, 그룹사운드 보컬을 거쳐 색소폰 실력이 주위에 알려지자 중학교에서 방과 후 색소폰 강사로 일해달라고 제안해 왔다. 그는 8년 여 학생들 색소폰 지도했고 그 계기로 결성된 통영시 동원중학교 ‘더샵 색소폰’ 동아리는 지금도 왕성한 연주를 펼친다. 이후 통영시 관내 공공기관에서 웃음 노래교실을 시작해 롱런하고 있다.

웃음노래교실 수강생 병원비 안 쓴다… “선생님은 대접받을 자격 있습니다.”

수강생에게 특유의 유머와 웃음 정을 나누며 15년 넘게 통영시 일대 주민센터, 복지관 등지에서‘웃음노래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그. 어느 날 할머니 수강생 한 분이 꼬깃꼬깃한 흰 봉투를 내 밀며 말했다.

“선생님 이걸로 밥 사무라. 선생님 니 덕분에 내가 요즘 병원을 안 간다 아이가. 자, 이거 내 병원비 선생님 주꾸마!”

그는 수강생들이 자기로 인해 즐겁게 됐다는 표현을 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어떤 수강생은 말한다.

“선생님은 정말 대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이렇게 재미나게 노래 배우고 지내겠습니까? 선생님은 충분히 자격 있습니다!”

그가 이 지역에서 가르치는 수강생은 400여 명. 인기 노래 강사들에 비하면 많은 수가 아닐 수 있다. 그는 수강생 수에 연연하지 않고, 작은 면 단위, 소규모 센터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 외롭고 쓸쓸한 분들에게 천금 같고 단비 같은 웃음과 노래를 선물한다.

“노래 강사들을 만나보면, 대다수가 목소리가 탁하다. 목을 쉬지 않고 쓰는 이유다. 노래 외에 한 분 한 분 관심을 보여드리며 격려하기도 하고 웃음도 줘야 하니1시간 반 수업을 하고 나면 매번 탈진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수업 마치고 피는 담배 한 개비다.”

남을 웃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공은 필수다. 그는 아침마다 뉴스 시청은 기본이고, 수강생에게 들려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수집하고 유머 책자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레퍼토리가 약하면 수강생들이 오늘은 좀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좀 더 재미있게 해 드려야 하는데…….’라며 노래 부르면서도 항상 생각한다.

연주하고 노래하며 재미와 웃음을 주는 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딘가 모르게 우수에 젖어 보이는 고뇌하는 표정을 지녔다. 그에게 지금 생활에 만족한지, 꿈을 물으니 그가 담박하게 대답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천직이고 나와 딱 맞다. 앞으로의 계획? 더 큰 꿈 그런 것은 없고 그냥 이대로 주욱 가는 거다. ‘통영민국’에서 만큼은 내가 최고의 스타라고 생각하며 색소폰 불고 노래하고 가르치며 이대로 계속 가겠다. 내 꿈은 ‘지금 이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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