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건영식품 김덕건 대표이사

고속도로 이용객들의 쉼터, 휴게소에 맛을 입히다
스포츠맨 특유의 끈기와 정신력으로 경영한다
한밭대학교 산업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42기 원우회장

정여림 작가 승인 2023.08.07 14:21 의견 0
(주)건영식품 김덕건 대표이사

학창시절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생업으로 식품회사에 입사해 고속도로 휴게소 영업담당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업계의 동향을 관망하다 그만의 포부가 생겨났고 자신만의 사업체를 꾸리기에 이르렀다. 기업을 해오면서는 몇 차례 시행착오와 위기도 넘겼고 암흑 같았던 코로나의 긴 터널도 지나왔다. (주)건영식품은 지난해 연 매출 200억이라는 큰 실적으로 회사의 입지를 다졌다.

가공식품 회사 운영뿐만 아니라 전국망의 고속도로 휴게소 매장 운영주로서도 그의 발걸음은 꽤나 분주했다. 휴게소가 가장 붐빈다는 8월을 앞두고 지난달 그의 사업장을 찾아 성공스토리를 듣는 것은 물론 그 이면에 치러야 했던 어둠도 들여다보았다.

(주)건영식품 회사소개

2004년 7월 설립해 2010년 4월 법인으로 전환했으며 형제 회사화 합한 총 직원수는 120명이다. 본사 및 공장은 대전시 대덕구 신일동로에 자리해 있다. 식자재 종합 유통 및 휴게 음식점업으로 시작하여 핫도그, 델리만쥬 등 빵류를 생산하는 제조업으로 확장됐다.

사업 초창기 지금은 폐업한 (주)델리스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델리스 고속도로 휴게소 유통망 구축 사업으로 성장했으며 (주)제너시스와의 제휴를 통해 BBQ치킨의 고속도로 휴게소 물류권 구축으로 이어졌다.

또한 국내 우수 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성장 발판을 마련했으며 현재 전국 지점 15개소와 휴게소 식당 및 열린 매장, 직원식당 등을 운영 중이다. 또한 60여 곳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1곳의 코레일 역사에도 제품을 공급하는 전국적인 유통망으로 지난해 매출액 189억 원을 기록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8월이 가장 성수기, 영원한 인기상품은 호두과자, 델리만쥬 핫바, 핫도그

“고속도로 휴게소가 가장 붐비는 달은 휴가철인 8월이다. 그 외 명절이나 단풍철도 매출이 올라간다. 사람들이 장거리로 이동할 때 한두 번은 꼭 들르게 되는 곳이 휴게소다. 출출함을 달래거나 요기를 하거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잠시 머무는 공간이지만 머무는 시간 만큼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다. 소비자의 필요에 맞춰 그들의 구미에 맞는 제품과 환경을 계속적으로 연구 개발하는 것이 숙제다.”

그의 말마따나 휴게소 매장이나 가판대는 각양각색의 간식거리가 즐비해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고정으로 찾게 되는 인기 간식류는 대개 정해져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아무리 신제품들이 나와도 사람들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다. 휴게소 하면 떠오르는 간식이 호두과자, 핫바, 핫도그, 그리고 요즘 한 개그맨의 방송으로 인기를 끈 소떡소떡(소시지와 떡을 함께 볶은 일종의 떡볶이)이 주류다.

아주 고전적인 휴게소 간식인 호두과자의 뒤를 이어 인기를 끄는 휴게소 간식이 건영식품의 ‘델리만쥬’와 핫도그다. 호두 모양을 내기 위해 밀가루 함량이 높아 조금은 뻑뻑한 호두과자에 비해, 델리만쥬는 달걀 함량이 호두과자의 2배 이상이라 부드럽고, 팥소 대신 넣는 커스터드 크림은 달콤하고 상큼한데 뜨겁게 먹으면 한결 맛있다는 그의 설명이다. 그의 회사 핫도그 또한 최상급 소시지로 만들어 그 맛의 수준이 남다르다고 그는 자사의 제품을 소개했다.

휴게소 음식이 비싸다? “휴게소의 편의시설을 깨끗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는 서비스 비용도 생각해 주었으면…….”

휴게소 음식이 일반 시중에 비해 좀 비싸다는 항간의 시선에 대해 김 대표는 덧붙였다.

“고속도로 이용객들은 휴게소의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청결한 화장실을 이용하고, 따듯한 물이 연중 나오는 세면대에서 손도 씻고 용품도 소비한다. 차량에 쌓여 있던 쓰레기도 휴게소 휴지통에 내놓고 깨끗이 청소된 벤치에서 쉬기도 한다. 휴게소 환경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비용을 저희 매장에서 부담하고 고객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을 좀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매월 쓰레기 처리와 청소를 위한 인건비와 부대 비용도 만만치 않고 도로공사 측에 부담하는 수수료도 있다. 이런 제반 사항을 고려해 저희 휴게소 업체들은 소비자에게 최대한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려 항상 고민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보다 나은 서비스를 위해 휴게소 매장들은 주기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야 하고 도로공사 측의 정기적인 위생, 서비스 등의 종합평가와 진단도 받는다. 그 결과에 따라 일정 수준의 평가 등급에 미달할 때는 계약이 철회돼 영업을 할 수가 없기에 점주들은 항상 긴장을 곤두세운다. 이용객이 소비하는 물품에 휴게소의 편의 공간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료가 플러스 돼서 부담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생각지 못했던 점이다.

현재 건영기업은 고속도로 직영 연립매장에 제품을 납품하고 푸드코트를 운영하는데 휴게소 특성상 근무하는 직원을 구하기가 힘들다.

“열두 시간 영업을 하니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운영하고 푸드코트는 밤 열두 시까지 운영한다. 직원들은 시간제로 시차를 두어 근무하는데 젊은 사람들의 지원이 드물어 갈수록 고령화되는 면이 있다.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꺼리는 시대라 경영에 애로가 많다. 그래서 이제는 칼질하고 일일이 조리하는 복잡한 공정 없이 그냥 봉지 뜯어서 데워주는 반제품이나 간편식을 이용해 조리하는 방식으로 변해가는 편이다. 휴게소는 이동객 규모에 따라서 바쁠 때는 무척 바쁘고 한산할 때는 또 많이 조용하다. 인력관리가 가장 힘든 점 중 하나다.”

사업의 위기는 곳곳에 복병으로 숨어 한때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그의 인생길은 고속도로처럼 쭉쭉 뻗어 가지만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배구선수로서 숨 가쁜 승부의 장에서 한판 땀 흘렸고, 좋아했던 운동이었던 만큼 좌절의 시간도 컸다. 강인한 체력 덕분으로 입대해서는 특수부대에 선발돼 모진 훈련과 민첩한 단련의 시간을 가졌다. 제대 후 진로를 고민하다 좌충우돌 실패도 겪지만 그는 넘어진 자리에서 매번 다시 일어섰다. 20대에 사회 초년병 시절 종잣돈으로 모은 돈을 믿고 있던 직원에게 떼였다.

“제대하며 모은 돈과 배구 코치할 때 퇴직금으로 종잣돈이 모였다. 대전역 앞에 30평짜리 점포를 얻어 건강식품 유통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는데 6개월 만에 망했다. 당시에는 계산서에 할부 도장 찍는 시대였다. 매출을 계산하면 계약금으로 받은 돈은 영업 수당으로 나갔다. 영업 수당 나가고 나머지 채권은 할인해 팔았는데 동업한다는 사람이 돈을 갖고 날랐다. 저는 물건 대금을 못 치러 소송을 당해 한때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6개월 만에 가진 돈을 떼이고 빚까지 지니 너무 억울하더라. 딸린 가족이 없이 혼자였으니 다행이었다.”

40대 개인 사업자가 돼서는 점포 계약 관계로 사기를 맞아 더 큰 거금을 날렸다. 신용불량자가 돼 도산할 위기를 맞았지만 그 또한 구사일생으로 극복했다. 대다수의 사업자가 그렇듯 코로나로 고속도로를 이용한 이용객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코로나 도산위기가 닥쳐 죽을 만큼 힘들었다. 직원들 인건비를 주기가 힘들어 감원도 했고 정부 보조금으로 견디기도 했다. 다행히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한 고속도로 휴게소 매장의 입찰에 참여해 로또보다도 당첨되기 힘들다는 매장을 낙찰받으며 그의 사업에 큰 힘을 얻었다.

스포츠맨, 특전사에서 다져진 체력과 정신력은 그의 든든한 버팀목

20대 초 진로를 고민하고 한때 방황하다 군에 입대했는데 특전사 3여단 특임대에 배치됐다.

“한창 미래를 걱정하며 방황하던 시기라 아예 식사를 안 하고 술만 많이 먹고 다녀 깡말라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 고민이 많고 뭘 해야 될지 몰라 배회하다 군대를 가자고 마음먹었다. 62kg 나오던 시기라 체중 미달로 입대 심사에서 떨어질 줄 알았다. 상관이 특기가 뭐냐고 물어 배구를 했다니까 공을 주며 한번 해보라고 했다. 공을 조금 두드리는 것을 보더니 바로 특전사로 뽑더라.”

10대1의 경쟁률로 체력 테스트를 거쳐 특전사로 선발하던 시절이었다. 특전사로 근무한 6년여 시간은 9급 공무원 수준의 급여가 나와 월급 받으면서 군대 생활을 한 셈인데 특전사 훈련은 많이도 고됐다.

“그곳 훈련 강도가 좀 높은데도 몸이 불어서 나왔다. 제대하고 선배가 3개월만 봐 달라고 해 학교에 배구 코치를 시작했는데 3년 지도자 생활을 하다 결국 내 사업을 하고 싶어 정리했다.”

바다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보내던 시절,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다

군 제대 후 선배의 권유로 경남 삼천포시(현 사천시)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됐다. 주중에는 해삼과 전복을 따러 바다에 들어갔고 주말에는 부산 해운대에서 스쿠버 다이빙하며 문어를 잡고 입문자들을 안내하며 1년여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줄은 몰랐다.

“1997년도에 삼천포에서 아내를 사귀게 됐는데 아내가 22살, 제가 30살 때였다. 처가에 인사를 갔는데 장인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셔서 ‘스킨스쿠버 합니다.’라고 대답하니 ‘위험하지 않나? 그럼 딸 못 준다.’고 하시더라. 하하.”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했고 결혼 전 사업 실패로 쌓였던 부채도 조금씩 갚자 건영식품의 전신 격인 모 식품회사에 1998년에 입사하게 됐다. ‘나는 셀러리맨으로 회사 생활을 할 체질이 아니다!’라는 자신의 내면 목소리를 지울 수가 없었다.

(주)건영식품 신축공장 준공

결혼해 식품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 업계의 흐름 읽고, 마침내 독립하여 법인을 설립, 직영 매장도 늘려갔다

입사해 휴게소 매장 납품 담당을 하다가 업계의 흐름을 읽은 그는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휴게소 매장을 열게 됐다.

“회사에 소속돼 영업 활동을 하던 중, 호두과자를 취급하던 평범한 매장이 델리만쥬라는 새로운 품목을 취급하면서 매출이 4배 이상 뛰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그때 저는 회사에 소속된 월급쟁이의 한계를 실감했고, 제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고 2004년 다니던 회사의 총판점을 개설하게 됐다.”

그는 입사했던 회사의 ‘델리만쥬’ 상표권을 사용해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건영식품의 대표 상품 ‘델리만쥬’는 영어의 delicious(맛있는)와 우리 말 만쥬(만두)를 합성해 ‘맛있는 만두’라는 뜻의 합성어다. 이후 2019년 그는 ‘하이만쥬’와 ‘만쥬피아’라는 두 개의 상표권을 자체 등록하며 점점 직영점 수를 늘려갔으며 취급 품목도 다양화시켰다. 2010년도에 (주)건영식품 법인을 설립했는데 현재 연 매출 200억대를 기록하고 있다.

“거래처 직원과 술도 같이 먹고 관계를 돈독히 하며 열심히 영업했다. 취급 품목도 늘리고 직영 매장도 조금씩 확장해갔다. 직영 매장을 늘린 것이 주효했다. 직영 매장을 늘려야 매출과 직결돼 안정적으로 제품의 판로가 열린다. 지금은 건영식품 직영점은 15개 정도다.”

10대 때 배구 선수로 기대주였던 그는 2남 1녀 중 장남, 요식업을 하던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어두운 시절 겪어

그는 2남 1녀 중 장남이었다. 현재 그의 남동생은 그의 사업파트너로 함께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대전 선화동, 오정동 부근에서 중식당을 운영했다.

“선친은 중식당을 해 오시다 나중에는 YMCA 대정역 앞에 욕심을 내서 크게 가게를 여셨는데 그만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보증금도 까먹고 손실이 커 살던 집에서 이사까지 나가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다. 한창 운동하던 시절이라 시합 갔다 집에 돌아왔는데 이사 가고 없었다. 쪽지를 보고 이사한 집을 찾아갔지만,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초라한 흙집에서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방에 누우면은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했고 추레한 모습에 무척이나 속상하고 울적해 방황을 많이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할지 말지도 고민했다.”

소년체전에도 출전하며 한참 운동으로서 인정받아 기대주였던 그는 그 계기로 많이 상심했고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때 운동했던 친구 중 일부는 프로팀 감독을 하기도 하는 등 체육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며 그는 회상했다.

“직원들과 공존하며, 자식 키우며 즐겁게 살고 싶다.” 소속된 모임이 50개가 넘어…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며 웃고 스트레스 해소한다

기업이 여러 위기를 극복하며 최근에는 제법 기반을 다지고 있는데 소감을 물었다.

“현재 사업 기반이 다 잡힌 건 아니다. 사업을 하려면 제 돈으로 다 할 수 없고, 저희 회사도 빚의 비율이 꽤 된다. 재투자라 생각해 지난해 신탄진공장도 신축했다. 사실 돈을 벌어도 그 돈이 내 돈이 아니다. 소속된 직원들이 늘어감에 따라 사주로서 책임감도 커진다. 직원들과 다 함께 성장 발전해야 하니 그만큼 어깨가 무겁다. 저는 일흔이 넘어서까지도 은퇴할 생각이 없다. 작게는 제 가정으로 보면 세 아이 공부시키려면 갈 길이 멀다. 막내가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다.”

그의 꿈을 물었다. 특전사 출신의 배포가 커 보이는 김 대표의 꿈은 생각보다 소박했는데 사람 좋아하는 그의 소탈한 면이 읽혔다.

“직원들과 함께 공존하며 자식 키우며 즐겁게 살고 싶다. 지금 제가 소속된 모임이 50개가 넘는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며 웃고 스트레스 해소하며 살고 싶다.”

그는 지난 3월부터 한밭대학교 산업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 입학해 수학하고 있는데 이 입학생들의 친목 모임인 42기 원우회 회장을 맡았다. 그만의 소탈하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75명이나 되는 입학생들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수업에 참여하고 활발한 소통을 한다. 지난 5월에는 42기 원우회에서 한밭대학교 개교 96주년을 맞이해 대학발전기금 1000만 원을 기부해 지역 사랑의 훈훈한 미담을 전했다.

활발한 사회활동과 대외관계로 항상 바쁘게 다니는 그. 가정에서는 어떤지 물었다. 남편, 아빠로서는 물론 처가에서도 사랑받는다는 듯 그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장모님은 막내 사위인 저를 특히 좋아하신다. 처형들도 저랑 술도 먹고 대화하는 걸 좋아해 자주 만남을 가지려 노력한다.”

(주)건영식품 향후 중견기업으로서 튼튼히 성장할 것, 지속적 연구개발과 인재영입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사업가로서 향후 계획을 물으니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중소기업의 목표는 당연히 중견기업으로 튼튼히 성장하는 것이다, 저희 건영식품은 항상 소비자 입장이 돼 제품을 생산한다. 소비자가 만족하는 제품 연구를 위해 뛰어난 인재도 계속 영입하고 제품의 미국 수출을 위한 기반도 열심히 구축하고 있다. 소비자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끝없이 매진해 향후 연 매출 1000억 원 달성을 목표로 나아가겠다.”

대전광역시 e스포츠협회 회장 김덕건

그는 대전 e스포츠협회 창립 소식을 듣고 그는 회장직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게임 산업은 젊은 세대가 글로벌 무대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분야며 그런 활동의 장을 만들 필요성을 인식해서다.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 e스포츠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대전광역시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할 선수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제반 사항의 준비를 위해 대전 e스포츠협회 조성의 필요성이 급하고 절실했고 그는 기꺼이 협회의 회장을 맡아 든든한 지원군이 된 것이다.

이후 대전 e스포츠협회는 전국 최초로 두뇌 스포츠로서 대한체육회에 가입했으며, 전국 지자체로서도 최초로 대덕구 e스포츠협회가 등록을 마쳤다는데 그의 협회에 대한 애정은 크다.

“저도 e스포츠는 잘하지는 못한다. 옛날에 우리 클 때는 ‘갤러그’밖에 안 했다. 그것도 인터넷 게임으로 분류된다. 스타크래프트, 리니지, 배틀그라운드 등 갈수록 다양한 게임이 생겨났고 이 게임을 즐기는 계층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종목들이 e스포츠로 이제 당당히 자림 매김 됐다. 두뇌 체육으로 분류돼 정식 체육회 등록이 됐다. 향후 게임 콘텐츠 사업은 굉장히 큰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는 e스포츠 협회를 통해 장차 유망한 꿈나무에게 길을 열어주고 이 산업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큰 보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체육인 출신답게 대전시 배구협회의 부회장을 10년간 맡았으며 사회 봉사에 열심이다.

김덕건 대표

(주)건영식품 대표이사
한밭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42기 원우회장
한국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 회원
MAINBiz 대전세종충남연합회 대전중앙지회장
한국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 전국연합 이사
대전세종충남연합회 수석 부회장
대전광역시 e스포츠협회 회장
前 대전광역시 배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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