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숙제, 이종선 (1946~)

김경희 작가 승인 2023.09.08 17:10 의견 0
이종선 (1946~)

고통의 무게를 균등하게 재는 잣대는 단연코 없다. 무게로 평가할 수 없으며 각자의 삶의 여건에 맞게 재단되고 저울질 된다. 그래서 규범이라는 것은 억울한 이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저마다의 처한 상황과 고통의 무게를 확정할 수 없다. 억울한 이들이 양산된 그 테두리 안에서 고엽제 피해자들을 만날 수 있다. 외연으로는 바로 인식할 수 없는 아픔, 그러나 대를 잇는 고통을 수십 년째 참고 견뎌내야 하는 고엽제 피해자들…….

그들과 함께 13년째 고락을 같이 하는 이종선 회장님.

월남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20대 초반의 청년이 겪은 전쟁터의 살벌한 현장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이야기 말미를 구들장 같은 온기로 따뜻하게 데워주셨다. 그 온기의 발원지는 바로 어머니 사진.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지갑에서 꺼낸 오래된 흑백사진, 바로 쪽진 머리의 촌부, 회장님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어머니 사진을 꺼내는 회장님의 붉어진 눈시울이 전쟁터의 비화에 상기된 마음을 잠재웠다.

그리운 어머니
20대 초반

■ 스물두 살 월남행, 끝나지 않는 숙제를 안고 살아 돌아오다

그날의 충격은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고 그 굉음이 우리 쪽으로 가까이 온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그는 사라졌다. 좀 전에 담배를 건넨 보은에 살던 전우였다. 더군다나 제대를 몇 달 앞둔 선임하사. 포탄 소리에 우리는 개인 방공호에 몸을 숨겼는데 옆자리 전우가 포탄 소리에 사라졌다. 피로 얼룩진 군복이 내 머리 위 나뭇가지에 걸쳐 있다. 바로 옆 방공호안에 있던 전우는 사라지고 그가 입던 군복만 주인을 잃고 피로 얼룩져 걸쳐졌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정신이 온전할 데다. 순식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목숨을 부지했고 전우는 형체를 알 수 없이 사라져버렸다. 넋을 놓게 된다. 바로 살벌한 전쟁터의 단면이다. 스물두 살의 나는 전쟁을 실감하면서 365일간의 월남전투를 시작하게 됐다.

월남전과 고엽제는 함께 가야 하는 평행선처럼 되었지만 여기까지 오기에도 숨이 벅찼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숙제를 안고 얼마나 더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스물두 살,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았던 그때 월남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포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에 스물두 살 어린 청년이 스스로 그 생존의 현장으로 걸어들어갔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전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 졌다. 겨우 살아 돌아오는 길은 고엽제 피해라는 끝을 모르는 숙제까지 떠안고 돌아오게 되었다.

枯葉劑(고엽제), 굳이 부연설명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라는 말이다. 나무이파리들이 말라 죽어 가면 숲에서 공존하는 생명체의 안위 또한 보장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치에 접근할 수 있다. 사람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뿌려진 고엽제를 몸으로 맞은 사람, 고엽제가 흘러들어온 물을 마신 사람, 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우들 중 고엽제를 온몸으로 맞은 이도 있고 우리처럼 고엽제가 흐르는 물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수도 시설이 없어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고엽제의 피해를 보게 되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청년들, 자발적인 출병이 아닌 상황에서 365일의 생존 현장은 매일이 서슬 퍼런 칼끝에 서 있는 날들이었다. 다들 고향에서 어렵게 살던 전우들이라 역경에 길들여져 우리나라 군인들이 투지가 대단했다. 그 생사의 현장에서 365일을 견뎌낸 청년들이 돌아오는 길에 ‘고엽제 피해’라는 인생의 숙제를 안고 돌아오게 되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원폭 피해도 당대가 아닌 후대에까지 악순환의 고리로 연결되었다. 명분은 다르지만 우리도 원폭 피해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식탁 위에 오른 수두룩한 약봉지도 우리의 현실을 대변할 수 있지만 곳곳에서 소리 내는 피해자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 듣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끝나지 않은 숙제로 다가온다.

피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고 시간이 흘러 자손들에게까지 피해가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우리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 그래서 조직의 출발이 늦었고 외견상 드러나는 피해를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없는 억울함을 동반하고 있어 고엽제 피해자들의 안타까움은 말로 부연설명하기도 죄스럽다. 국가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그 젊은 날이 억울한 이를 양산하는 전쟁터에 버려진 희생양이라는 생각에 멈추면 회한이 밀려온다.

국가는 보상을 약속해왔지만 우리의 고통을 피부로 체감할 수 없으니 늘 역부족이다. 고엽제 피해자들이 옥천에도 150명가량 대부분 연령대도 75세 이상이 다수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여기까지 다들 힘들게 버텨왔지만 나이 들어가는 우리가 더 힘낼 수 있도록 국가에서 조금 더 살뜰하게 살펴주기만을 내내 바라고 있다. 바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현실의 벽은 아직도 높다.

■ 다섯 살, 처음 만난 전쟁― 6·25

우리 세대가 전쟁을 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그 아슬아슬한 세대임은 틀림없다. 다섯 살 되던데 6·25 전쟁이 났다.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어린 나에게 충격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포탄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우리 식구들은 방공호로 피신을 했다. 내가 처음 겪은 전쟁이었고 이후 스무 살이 넘어 나는 전쟁터에 몸이 내던져졌다.

고향인 용담댐 동네에서 다섯 살 무렵 6·25를 만났다. 포탄 소리가 나자 집 방공호 안으로 들어갔던 어린 꼬마의 기억을 가져올 수 있다.

고향은 내내 그리움이고 그 그리움 끝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지금도 어머니 사진을 지갑에 모셔놓고 매일 문안인사를 드린다. 전쟁의 아픔도, 삶의 고단함도 다 그리운 어머니 품에 안기면 잠재워진다.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내내 가슴에 존재하는 어머니, 그래서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고향에서 초년을 보내고 대전으로 나가 학창시절을 보냈다. 월남에 다녀온 후 한전에서 30여 년 근무하고 무주 양수 발전소에서 퇴직을 했다. 옥천에 터를 잡고 13년째 고엽제 전우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우리들의 소리가 국가에까지 미치기엔 아직 역부족이지만 사무실에서 서로 만나 위로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힘이 되고 있다. 매달 다 같이 모여 보훈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는 동지들이기도 하다. 수두룩한 약봉지를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동지들끼리 쉼터에 모이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 무심한 세월 속에 잊혀지는 아픔

사무실 캐비넷을 열면 군복들이 나란히 걸려있다. 아직도 국가관은 투철하지만 월남전 후유증은 내내 사그라지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 온 그 기백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독려하고 있다.

맹호부대원으로 1969년 1년간 다녀왔던 그 전쟁의 현장, 살육의 현장을 우리는 나이 들어 여행지로 다시 다녀왔다. 스물두 살 어린 청년이 맹호부대원으로 퀴년항에 도착했던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우리는 맞았고 조명탄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면서 전쟁터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수류탄을 양쪽에 차고 수색하러 다니는 자체로 우리는 매 순간 목숨을 담보로 연명하는 날들이었다.

그 기억을 안고 다시 찾은 베트남은 평화로웠고 젊은 날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 어느덧 추억으로 덧입혀졌다. 그래서 세월은 무심하지만 힘이 있다.

아직도 외출할 때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양복을 차려입는다. 봉사직이지만 보훈단체의 회장이고 역사의 증인이 되는 책임감이 크다. 이번 여름은 내내 긴 장마와 싸움을 하고 있다. 폭염 또한 우리를 엄습한다. 스물두 살에 만났던 베트남의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덥고 지루한 비, 우리가 안고 있는 끝나지 않은 숙제처럼……. 立秋가 지났다. 절기를 못 속인다고 하늘은 이미 가을이다. 역사의 증인으로 남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 소식들이 이 가을에 엽서처럼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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