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백의 복지이야기] 홍범도 장군은 누구인가?

김동백 교수 승인 2023.09.08 18:10 의견 0

홍범도 장군은 1868년 10월12일 평안토 평양부에서 출생했다. 홍범도 장군은 10대 중반에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를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군대에서 이탈을 하여 금강산에 있는 절로 출가하게 된다. 절로 들어간 홍범도 장군은 절에서 글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배우며 여자 승려를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 후 홍범도 장군은 아내와 절을 떠났고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10년 동안 했으며, 청일전쟁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의병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 대한 북로독군부 한국 독립군 엽합부대는 중국 지린성 허룽현 펑우동에서 일본군 월강 추격대대와 전투를 지칭한다. 이것이 바로 봉오동전투다. 봉오동은 분지의 형태였다.

대구와 흡사한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 정도 형성이 되어있었고 골짜기 안에는 마을이 3개가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지형을 고려하여 4개 중대로 포위하는 형태로 나누어 배치를 하게 된다.

신식 총기로 무장을 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진 일본군에 비해 그 화력이 미약했으나 일본군은 독립군의 화승총 정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무시하다가 크게 당하게 된다.

특히나 매복 작전에 대한 자신이 있었던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 내내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려 전투에 임했다. 조선인 민간인들은 계속 사실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가고 일본군은 계속해서 봉오동으로 진격을 하게 되는데 일본군이 매복한 지점으로 도착하자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히 사격했고 일본군은 힘 한 번 못쓰고 퇴각하게 된다. 일본군 부대는 봉오동에서 철수하게 되고 홍범도 부대는 일제 추격대를 격퇴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독립투사들은 한반도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중국과 러시아 쪽의 만주, 연해주로 이주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에 만주 지방의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토벌 작전을 계획한다. 혼춘사전을 조작함으로써 출병의 구실을 만들고 대규모의 일본군을 간도에 투입 했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고 백두산 부근 화룡현 일대의 밀림 지대로 집결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연대장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침입한 일본군을 백운평계곡 에서 섬멸하였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군 엽합이 완루고, 고하동, 봉밀구, 천수평의 밀림지대에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인 것을 총칭해서 ‘청산리전투’라고 말한다. 그중 가장 큰 규모로 장시간동안 펼쳐졌던 혈전이 바로 어랑촌 전투다.

여기서 일본군은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독립군 최대의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때의 일본군들은 독립군의 2배 이상의 병력과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독립군의 굳건한 항전의지와 현지 한인주민들의 헌신적인 지원, 자발적인 정보활동이었다. 독립군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국독립전사상 최대의 대첩을 만들어 냈다.

항일무장투쟁에서 큰 승리로 꼽히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 그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무장 독립 투쟁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며 일제에 나라를 빼아ㅛ긴 한은들의 아픔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평생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홍범도 장군은 머나먼 타지에서 광복의 기쁨도 맛보지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홍범도는 1927년 소련 공산당인 볼셰비키당에 입당한다. 홍범도와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는 당시 소련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지원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요하게 공산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이동휘는 독립군마저 소련군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하였지만 독립군이 거부하여 실패했다. 대신 이동휘는 속임수를 써서 4500여 명의 독립군이 자유시(소보보드니)에 모이도록 유도하였으며 몰래 숨어있던 소련군은 붉은 군대(적색군)에 편입을 거부한 조선 독립군을 기관총, 대포, 장갑차를 앞세워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자유시 참변에서 700~ 800명가량의 독립군이 희생되었고 1000명이 넘게 시베리아와 만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면서 병들거나 죽었다. 자유시 참변을 끝으로 한국 무장독립운동은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궤멸되었다 살아남은 독립군은 적색군에 편입되어 소련의 용병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투쟁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다. 이동휘와 사상적 동지였던 홍범도는 독립군을 유인하여 무참히 학살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여러 가지 정황과 의혹을 받고 있다.

그 후 홍범도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하게 된다. 소련식 사회주의 집단농장에 배치되어 운영을 맡다가 말년에는 극장 관리인으로 일하며 레닌에게 충성하며 홍범도는 레닌에게 하사받은 권총을 자랑스러워하며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였다고 카자흐스탄 고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독립군 지도부였던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소련군에 편입되었을까? 도대체 홍범도는 무슨 공을 세웠기에 레닌에게 직접 권총까지 하사 받았을까? 홍범도는 말년에 왜 소련 KGB에게 얻어 맞아 죽었을까? 여러 의문점과 논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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