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양치중, 처절(悽絶)한 몸짓, 최고령 문화해설사의 外皮

김경희 작가 승인 2024.01.09 15:45 의견 0

가시밭길 폐허에서 살아남은 외아들의 일대기. 물려받은 전답은커녕 부모님도 기댈 언덕이 안 됐던 그 시절을 헤쳐 나왔다. 이제 그 상흔은 딱딱한 외피를 만들고 껍질은 기어이 떨어져 나가 새살이 뽀얗게 차올랐다. 지루한 시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팠던 기억이 그리움으로 박제되어 오늘의 나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오래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열아홉 살의 어머니, 이후로 더는 어여쁘지 못했던 가련한 어머니와 다시 만나며 어린 나로 돌아가본다.

부모님의 만남은 불운부터 낳았다

어머니에게 결혼은 축복이 아니라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장흥 친정집에서는 큰딸로 부유하게 살다가 열아홉 살에 강진군 대구면으로 시집을 왔다. 때는 1935년. 시집와서 보니 시부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땅 한 뙈기의 유산도 없어 처마 끝이 머리에 닿는 기막힌 형국이었다. 어머니는 시집온 지 1년쯤 지난 어느 봄날, 납득하기 어려운 사고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불운을 만났다. 전염병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아버지의 불운과 더불어 두 분의 고행은 끝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어린 나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아들만은 당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부성애였다. 나는 호적이 두 살 늦게 되어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입학 전까지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한글 모음과 자음 받침을 포함한 본문을 모두 터득했다. 마음 둘 곳이 없던 아버지에게 영특한 내가 큰 위로가 되었다.

1950년 음력 5월 21일, 비 오는 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 집 모심기를 하면서 점심을 먹고 체하여 자리에 누운 지 3일 만인 5월 23일에 불현듯 돌아가셨다. 내 나이 만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장사 지내는 날 상여의 뒤를 따라 산에 가서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데 어찌나 서러운지 집에 도착한 뒤에도 통곡과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만 열두 살 소년가장, 몸과 마음이 표류하다

1950년은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25전쟁까지 겹쳐서 더더욱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에 휴학하고 그해 겨울,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외가에 가서 김을 생산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침이면 남쪽 바닷가 옹암마을까지 이십 리를 걸어 다니며 바닷물에 떠서 까맣게 나풀거리는 생김을 뜯어다가 지게에 지고 늦은 저녁 먼 길을 가다 쉬기를 반복하며 외갓집에 가져왔다. 얼음을 깬 찬물로 깨끗이 씻어 해뜨기 전에 발장에 김을 떠서 건장에 말려야 했다.

쌀과 땔나무가 떨어지면 주변에 마을이나 인가도 없는 산 계곡 대숲 길을 처량히 홀로 달리듯 걸어갔다. 달이 눈 내리는 밤을 등불처럼 밝혀 쓸쓸한 동행의 벗이 되었다. 허나, 바닷가 열두 모퉁이 길을 돌아서 걸어가면 어린 마음은 공포감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곤 했다. 정말 모진 것이 목숨이라 죽지도 못하는 설움을 그 어린 나이에 탄식하면서 겪어냈다.

마을의 일꾼이 되다, 대구면 촉탁 서기로 임명

열여덟 살, 강진경찰서 대구지서에서 일한 지도 벌써 5년에 가까운 기간이 흘렀다. 그동안 홀로되어 하나뿐인 아들을 키우며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어머니와 늙으신 할머니 그리고 어린 누이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감이 나를 지탱시켰다. 내 삶의 가장 큰 무기는 ‘인내와 노력’ 이 전부였다.

1963년 1월에는 대구면장으로부터 대구면 촉탁 서기 임명장을 받고 업무분담도 함께 받았다. 총무계 소속의 공보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쓸쓸한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나의 성장은 실로 놀라웠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동안 맡은 업무 중에 마을문고 독서회 사무를 처리하면서 대구면 마을문고 협의회 간사를 맡았던 때가 일하는 기쁨이 가장 컸다.

내 인생의 8할이며 든든한 우군, 아내

29살 되던 해, 설 명절이 지나고 면사무소 근무 중 숙모님 되는 분이 찾아오셔서 아가씨를 중매하셨다. 공영자, 아내도 나처럼 결핍투성이 유년을 보냈던 터라 두 가정의 환경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아 마음을 더욱 강하게 묶어버렸다. 1년여의 기간을 사귀고 그해 겨울 장가가는 날, 함박눈송이가 나비처럼 나풀거려 우리의 앞날도 날개를 얻은 것 같았다. 나는 29살이었고 아내는 일곱 살 아래인 22살이었다. 이후로 야무진 두 청춘 남녀가 끌고 가는 인생 열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한국일보 지국 설치, 지역 미담을 직접 써서 송고하다

우리 부부는 5남매를 키우며 한 가지 직업으로는 연명 수준의 날들을 면할 수 없어 아내가 구멍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 1970년 초여름 어느 날, 강진읍에서 한국일보 총국을 열었다. 마량에 분국을 두고 강진, 장흥군 경계의 외딴 마을과 배로 다니는 완도 고금면까지 신문중계를 했다. 총무와 배달원을 두고 관내에서 일어나는 미담 기사를 써서 한국일보 서울 본사에 송고했다. 기사는 신속하게 신문에 보도되어 독자의 호감을 사고 구독자 확보에도 많은 효과를 보았다. 나는 무슨 일이든 주어지면 성실한 건 기본이며 그 외에 무엇을 해서 극대화를 시킬 것인지 항상 궁리했다.

청년기의 사색이 꽃을 피운 문학 활동

나는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에서 또래 아이들보다 신체적으로 왜소하고 허약했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 아버지께서 타계하신 후로는 때때로 고독과 싸우며 더러는 사색에 잠기는 소년기를 거치면서 문학 서적을 통해 삶의 위안을 받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문학활동을 이어갔다.

2006년 8월 강진문화원 대강당에서 전남문인협회와 강진문화원이 공동주관한 나의 첫 시집 <천년을 나는 학>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다. 2008년 전남문인협회가 주최한 제31회 전남문학상 시상식에서 전남문학상 수상자로 내가 선정되었다. 나는 평소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취미였으며 그래서 문단에 등단했고 시집을 냈으며 문학 활동을 하다 보니 뜻밖에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전라남도 22개 시·군의 수많은 전남문인협회 회원 중에는 전남문학상을 평생토록 수상하지 못한 분들도 많을 텐데 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강진에서 전남문학상 수상자는 내가 최초이며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최초 수상과 연관되는 일들이 많았다. 아마도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도전 정신으로 살아야 했던 지난날의 반증인 듯하다.

해피엔딩을 꿈꾸며, 인생 여정의 마지막 활동 최고령 문화해설사

지금은 주 3~4회 유적지의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강진은 지역 자체가 보물이며 유적지라 17개 유적지나 유물 전시관이 모두 역사적인 가치가 탁월한 곳이다. 문화해설사의 역량 또한 다른 시군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85세의 내가 그 대열에서 아직도 뒤처지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결핍투성이 유년이 엊그제 같은데 지역의 ‘어른’이 되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어느 철학자의 글귀가 새롭게 다가오는 시절이다. 죽음도 내 삶의 일부, 나는 의연하게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채우면서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을 반갑게 맞을 것이다. 지루한 폭염 끝이라 높은 하늘은 더 고맙고 선선한 바람이 아내만큼 귀하다. 오늘 ‘청자박물관’에서는 어떤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박물관 뜰 앞의 작약군락이 유난히 탐스럽고 화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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