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듯이… 1938년 최명희 어머니

김경희 작가 승인 2024.02.07 15:08 의견 0

여든여덟 해를 사는 동안 매 순간 쓰러지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신 어르신. 이제는 넘어질 일도 일어설 일도 없으시다. 이제 거동조차 어려운 여건이라 차라리 뼛속의 진액까지 빼내가면서 살던 시절이 그립다시던 이슬 맺힌 눈동자를 기억한다. 어르신의 인생에도 우리 모두의 삶에도 힘이 되는 시 한 편 읊조려본다.

김종삼 님의 ‘어부’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있다

■ 운명 앞에 목 놓아 울다

1950년 가을, 그날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마음속에 화인처럼 남은 그날의 애통함을 잊을 수가 없다. 강원도 고성에서 최 씨네, 김 씨네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포천 즈음에서 며칠간 숨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 가족 8식구, 이웃 가족 9식구가 한 가족이 되어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찐 감자, 주먹밥, 약초 뿌리 등을 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 외에는 삶의 방도가 없던 시절이다.

동무들

한낮의 햇살은 우리의 고통과는 전혀 무관한 채 얄미울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따사로운 햇살이 내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변소 문을 열고 나오던 나는 지옥을 목격하고 말았다. 푸른 옥수수밭은 온데간데없고 붉은 옥수수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식구들이 기거하던 허름한 천막도 자취를 감추고 피란민들의 비명만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아, 수류탄이 터졌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가족을 다 잃어버렸다. 옥수수 대 위에 걸쳐진 엄마의 붉은 광목 저고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떨어져 나간 팔뚝……. 아, 생각만 해도 숨을 쉴 수가 없다.

7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무수한 세월 속에서 나도 치매를 만나 지난 기억들과 차차 이별하고 있지만 그 날의 기억은 옅어지지 않는다. 가족들을 따라 죽겠다고 몇 날 며칠을 울던 계집아이는 그 후로 70여 년을 질진 생명력으로 살아냈다. 그날 살아남은 기적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 거센 파도를 겨우 넘다, 김명희에서 최명희로

혼자 남은 열세 살 꼬마는 하늘 아래 피붙이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같이 피란 오던 이웃집 아저씨께서 “명희야, 이제 우리 식구 하자. 밥은 굶기지 않을 테니 식구들 몫까지 잘살아야 한다.” 의지할 곳 없던 나에게 이웃은 구세주였고 나는 그 집 식구가 되어 내내 살아왔다. 김명희로 태어나 최명희로 살아가게 되었다. 대구까지 내려갈 생각으로 남으로 내려가던 우리는 영동에서 자리를 잡고 아저씨와 아줌마는 순대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일을 돕는 것은 당연한 나의 몫이었고 게으름피우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식구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덜 먹고, 더 늦게 잠드는 게 내가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천애 고아 천덕꾸러기가 되어 전쟁통에 어떤 모진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나에게는 걷어주신 은혜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저씨 아줌마에서 어머니 아버지로 모시게 되면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뼈저리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살면서 수많은 기적과 만났고 물론 누군가는 당연한 일상이라고 말한들 흠 잡힐 일이 없지만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온통 기적과 감사였다. 부모님 순대국밥집 일을 돕고 언니들 결혼하면 산후조리도 해주고, 오빠의 공장일도 남자들 못지않게 도왔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내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오빠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트럭 기사로 일하던 성실한 남자를 만나 스물두 살에 결혼을 했다. 뚝심 있고 착한 남자였다. 평생 나를 지켜주리라 약속하며 구애를 하던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니는 당신 배 아파서 낳은 딸 시집보내듯이 알뜰하게 챙겨주셔서 시집가는 날이 설움을 풀어내는 날이었다. 살림집을 구하고 4남매를 낳아 나도 가족을 만들어 살아가는 재미에 빠질 즈음 참으로 야속한 일이 또 내 운명 앞에 나타났다.

남편이 트럭 기사일을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운전하는 모습이 내내 조바심 났는데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가혹한 운명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참담한 마음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내 나이 마흔 살, 큰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줄줄이 4남매를 두고 닥친 남편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몰래 밤새 울고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에 양은 도시락을 건네면 우리 큰딸이 아무 말 없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에게 눈인사를 했다. 엄마의 설움을 알기는 했을까? 그래도 우리 큰딸 교복 입고 학교 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면 힘이 솟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듯이

남편을 선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가혹한 운명에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내가 약해지면 우리 아이들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 다시 기적처럼 소생했다. 남편의 보상금으로 작은 가게를 열고 국밥집을 시작했다. 전쟁통에 부모님 국밥집 일을 도왔는데 그때 그 어린 손길이 삶의 방편이 되었다. 저녁이면 재봉 일을 하면서 부수입을 만들었다. 그렇게 살아가니 또 살아지더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듯이.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뒷모습을 자녀들이 보고 우리 4남매는 내가 뿌린 씨앗보다 훨씬 큰 숲으로 성장했다.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입성 좋게 키우지 못해서 학비 안 드는 교대에 보내고 빨리 취업하라고 공무원 하라고 종용했는데 그 자리에서 일각을 이루었다.

햇살 가득한 집

세상이 살만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락으로 떨어져도 기적처럼 소생하게 만드는 자연의 섭리는 살면서 수시로 맛보았다. 억울하고 당장 목숨줄 끊고 싶은 날들이 없었다면 그 또한 거짓이다. 내 성정과 노력에 상관없이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한마디씩 거들겠지. 단 한 번도 여인으로 코티분 냄새를 풍겨보지 못했고 거울 앞에서 빨란 입술연지 한번 발라보지 못했다. 그렇게 여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었지만 아내로 엄마로 할머니로 살아가는 인생이 서글프지 않다. 기적처럼 나를 지켜준 고마운 이들이 잡아준 손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다. 한동안 영하를 맴돌 수은주, 우리를 둘러싼 여건들은 차갑겠지만 나를 지탱해 주는 우리 가족들이 있어 또, 이렇게 기적 같은 하루를 맞이한다. 살아보니 살아지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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